“인간의 창의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
프롬프트(prompt)만 잘 쓰면, 정답을 얻어낼 수 있다고들 한다. 프롬프트는 챗지피티 등 대화형 인공지능에 입력하는 ‘질문’. 대화형 인공지능들은 지구상에 거의 모든 언어 자료를 학습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무지한’ 인간들은 질문만 잘하면 될 것이다. 전지적(全知的) 존재인 인공지능‘님’이 좋은 질문에 정확한 답변으로 ‘은사’를 내리실 것이므로. 정말 그럴까? 지난해 말부터 끊임없이 세상을 뒤흔든 챗지피티 등 ‘생성 인공지능(생성 AI)’을 주제로, 〈시사IN〉이 ‘2023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준비한 이유다. 지난 3월 인터뷰한 철학자 김재인(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을 강연자로 다시 불렀다. 언어와 이미지를 ‘생성(창조)’하는 단계의 인공지능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포착하려면, 그 분야(인문학) 전문가의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콘퍼런스를 앞두고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이제 인간들은 질문만 잘하면 되나? 공부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더 많이 공부해서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기존의 것을 많이 알아야 질문도 잘할 수 있다.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암기도 중요하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켜고 뭔가 물어보는 것과 자신의 머릿속에서 꺼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빠른가? 검색은 (지식 축적에서) 마지막 단계로 봐야 한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비교해 검색 결과가 ‘새롭다’면, 그 ‘새로운’ 것을 새로 머릿속에 입력(기억)해 나가는 것이 지식 축적의 기본이다. 새로운 것을 알려면 공부해야 한다.
생성 인공지능이 충격적인 이유는, 기계가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가진 능력으로 보였던 ‘창조성’ ‘창의성’ 등을 인공지능이 이미 습득해버린 것일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창의성이란 무엇인가’부터 정의해야 한다. 그냥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고 해서 창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새로워 보이지만 ‘기존의 것’과 단지 다르거나 심지어 엉뚱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기존과 다른 동시에 더 유익하고 아름다운, 질적으로 우월한 종류의 활동·생각·제품에 대해서만 ‘창의적’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종류의 창의성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은 아니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거의 모든 언어 자료들로 공부했다면 ‘많이 아는 것’이고, 많이 안다면 새로운 것도 생성할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언어 자료들이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면, 인공지능은 창의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결코 현실을 그대로 담지 못한다. 언어는 현실에 비해 ‘과잉’이나 ‘결여’ 상태에 있다. 어떤 것이 현실에 없는데 언어에만 있다면, ‘과잉’이다. 허구, 거짓, 잘못된 정보 등이 그렇다. 사람은 뭔가를 꾸며내고 지어내는 걸 너무 좋아하는 존재다. 별을 보고 영웅과 신들의 이야기를 만든다. 문학이나 예술의 상당 부분이 허구이며 거짓말이다. ‘결여’ 측면을 보면, 언어는 현실의 많은 부분을 담지 못한다. 시각·청각 관련 정보는 상당 부분 디지털화되어 있지만 미각·후각·촉각 등은 언어 형태로 표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이 언어로는 예술적 경험을 기록하기 힘들다. 당신이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며 받은 느낌을 아무리 자세하게 언어로 설명해도 상대방은 그 느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런 언어 자료들로 학습한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의 현실을 제대로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인공지능의 언어 생성은 어떤 단어(문장) 다음에 어떤 단어(문장)가 오는지 확률적으로 계산한 뒤 출력하는 결과일 뿐이다. 인공지능은 ‘통계적 앵무새’이거나 책상물림에 불과하다.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 마이크로소프트는 GPT-4(챗지피티 등 대화형 인공지능이 기반한 대량언어모델)를 ‘인공일반지능(AGI, 사람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수준의 인지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의 불꽃’이라고 불렀다. ‘인공지능의 대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 대학 교수는 최근 구글을 사직하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가령 챗지피티는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코딩까지 하는 등 여러 영역을 오가며 작업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지능’과 가깝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맥가이버 칼은 가위·병따개·나이프·와인 오프너 등 여러 영역에 사용되지만, 일반지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일반지능의 보유자는 맥가이버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엔지니어 출신들이 인공지능을 과대평가한다는 생각은 든다. ‘특이점(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순간)’ 개념을 제안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인간의 영생(永生)까지 예측하는데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예컨대 ‘나’의 의식을 기계로 복제해서 2045년쯤 되면 인간의 영생과 불멸이 가능하다고 했다. 사실 황당한 이야기다. 이게 말이 되려면, 복제당하는 ‘나’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대체 ‘나’란 무엇인가? ‘나’의 어떤 부분을 복제할 것인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창의성을 탈취해 갈 것 같진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뜻인가?
생성 인공지능은 뭔가(문장·그림·영상·코딩)를 새로 만들고 창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생성 인공지능이 하는 일은 인간의 생각과 창의적인 활동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들을 흡수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물을 뱉어내는 정도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상당수 사람들이 인공지능으로부터 인간의 창의성을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공포감, 그 자체를 성찰해봐야 한다. 나는 인간의 창의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각성의 계기를, 인공지능이 마련해줬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의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창의성(창조성)은 생명의 원리와 관련된다. 지구의 생물종들(인간 포함)은 과거에 시도한 창의적 도전들의 성공 덕분에 지금 생존해 있는 것이다. 그 창의성의 결과들이 유전자에 보관되어 있다. 다만 인간 이외 생물들의 경우, 창의적 시도의 결과를 후천적 학습으로 발전시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오직 인간만이 후천적 학습의 창의적 결과인 기술과 지식을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해왔다. 이른바 ‘집단 기억’이며 ‘사회 기억’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생명의 정수이며, 창의성은 인간성의 본질 중 하나다.
창의성은 개인별 특성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창의성의 근원을 개인에게 두는 것은 18~19세기 낭만주의의 관점일 뿐이다. 낭만주의의 키워드는 ‘천재’와 ‘영감’이다. 천재는 하늘이 낳은 개인의 재능이고, 영감은 그 개인에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어떤 생각이다. 이런 낭만주의적 창의성 개념이 최근의 ‘개인주의적 능력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창의적 결과물은 특정 개인에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 역시 그 사람에게만 제공되어야 한다는 논리. 그러나 나는 창의성 역시 시스템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의성이 사회적 특성이란 이야기인가?
미국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논의(〈창의성에 대한 시스템 관점〉)에 따르면, 창의성에는 세 개 시스템이 함께 작동한다. 일단 과거로부터 전수되어온 기술과 지식이 있다(문화). 개인은 이를 물려받아 학습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개인). 그러나 개인이 생성한 것은 그 자신만 새롭게 느낄 뿐, 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이미 존재’하거나 ‘과거와 다르기만 하’거나 ‘엉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사회)이 개인의 결과물들을 평가하고 그중 괜찮은 것을 골라 ‘문화(과거의 유산)’에 새로 편입시킨다. 창의성에 따른 혁신이 전개되는 메커니즘이다. 문화, 개인, 사회 중 하나만 빠져도 창의성이 발현될 수 없다. 이 중 개인만 강조하는 낭만주의적 입장은 문화와 사회가 없어도 개인이 창고에 홀로 처박혀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개인들이 지구상의 부를 모두 가져가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의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앞으로 생성 인공지능의 시대가 본격화하면 인간(사회)의 창의성이 더 중요해질 수 있겠다.
인공지능 시대는 이전의 산업시대와 크게 다른 자질을 개인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산업시대엔 개인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 정년까지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들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계속 습득해나가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활동 중 상당 부분을 잠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생각의 근력 혹은 생각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상황이 닥쳐 새로운 지식이 필요할 때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 이에 필요한 훈련이 바로 인문학이다.
왜 인문학인가? 공학도 있고 수학도 있다.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어떤 영역과 업무에 종사하든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초 능력을 배울 수 있다. 인문학을 통해 어떤 삶이 더 좋고 가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지 배운다. 사상과 철학, 예술, 문화 등이 그 표현 형태다. 다른 중요한 기능도 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사랑’이다. ‘전통적 인문학’을 구성하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모두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문헌들을 한 줄씩 읽어가며 그 언어에 담긴 의미를 집요하게 캐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이를 통해 훈련된 문해력으로 ‘생각의 근력’을 키워서 세계와 타인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 ‘생각의 근력’이 인공지능 시대를 헤쳐 나갈 인간의 힘이 될지도 모르겠다. 공부 방법의 하나로 글쓰기를 강조한 바 있는데.
글을 쓰려면 생각해야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문제를 풀려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해하고 요약·정리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러스 알파(새로운 것)’를 추출해야 한다. 글쓰기는 문제의 발견, 데이터 처리와 종합, 플러스 알파의 추가, 멋진 표현이 합쳐지는 창조 과정이다. 글쓰기는 백지와 연필만 있으면 가능한 행위지만,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문학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인문학의 위기’란 용어만 공허하게 떠돌고 인문학자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버림받고 있다.
한국의 인문학이 현실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에 무관심하고 무능한 부문이 되어버렸다. 인공지능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여하려면 인문학은 현실에 밀착해야 한다.
‘현실 밀착’은 어떤 의미인가?
인문학은 과학·기술과 정치·외교를 따라잡고 경제와 복리를 선도하며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동안 문학·역사학·철학(문사철) 중심의 인문학은 세계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언어’가 확장되어버렸다. 지금은 수학과 자연과학, 예술, 디지털의 ‘언어’를 모르면 현실에 밀착할 수 없다. ‘확장된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문학을 수학과 자연과학의 언어로까지 확장하자는 것은 결국 (고교에서는 문과·이과가 통합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문과·이과라는 오래된 체계를 허물자는 주장인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문과 쪽 학생들이 수학·과학을 배우지 않아도 다가올 미래에 잘 대처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과 쪽 학생들도 세계에 대한 경험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앞으로의 세상이 격변할 것이고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등장할 것이며 이를 잘 따라가지 못하면 안 된다고 걱정한다. 그런데도 문과 쪽 그룹에겐 수학과 자연과학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 있다. 무책임한 ‘빼기식 교육’이며, 문과 쪽 학생들에게 수학과 자연과학을 외면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과 계열(언어·문학·역사·철학)과 이과 계열(수학·자연과학)로 분리된 지식들을 융합해서 생각하는 능력(확장된 문해력)을 갖추도록 교육이 설계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세상에선 언제든 자기가 원한다면 새로운 직무를 익힐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공교육은 그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최근 여러 인문학자들과 함께 에이아이파이브(AI FIVE)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인문학’ ‘인간과 기계의 긍정적 파트너십’ 등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확장된 인문학’의 실천으로 봐도 될까?
기술과 제도가 급변할 때 이에 잘 대응한 인문학이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만들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같은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변화에 대해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 생각들이 역사를 바꾸며 지금은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인문학 콘텐츠 엔터테인먼트’를 표방하는 ‘대학 밖의 대학’을 만들기로 했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서 인문학이 지질하거나 무력하기는커녕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인간과 기계의 긍정적 파트너십’이란 슬로건으로는, 앞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하는 주체는 같은 인간(예컨대 사장님)이지 인공지능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 간의 권력관계와 이를 규정하는 제도지, 기계가 아니다.
(8월7일 서울 페럼타워 페럼홀에서 열리는 2023 〈시사IN〉 인공지능 콘퍼런스에서 김재인 교수 등 여러 강사의 강연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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