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논단]北이 ‘美 정찰기 격추’ 협박한 속셈
1969년 4월 15일 오후 일본 아쓰기 해군비행장에서 이륙한 주일미군 전자정찰기 EC-121를 북한 공군의 MiG-21 전투기가 동해상에서 격추했다. 위치는 청진시 남동쪽 150㎞ 해상이었고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1968년 1월 원산 앞바다에서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 이후 자신감을 가진 북한은 정기적으로 북한 영공에 접근해 정보를 수집해가는 미 해군정찰기를 격추하는 대담한 작전을 계획했다. EC-121은 프로펠러 비행기로 속도는 느리지만 당시 최고 성능의 레이더와 전자 장비를 갖췄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북한 전투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멀리 달아나곤 했다.
강경 대응에 나선 미국은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인 USS엔터프라이즈 등 항모 4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5척 등으로 구성된 71기동전대를 동해에 배치해 원산항 앞바다에서 무력시위에 나섰다. 판문점에서는 북측의 요청으로 군사정전위원회가 긴박하고 살벌한 분위기에서 열렸다. 당시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전술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다. 당시만 해도 주일·주한미군 부대에는 전술핵이 배치돼 있었다. 그러나 핵 보복을 비롯한 미국의 응징은 실행되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정찰기 격추를 공산주의의 ‘시험’으로 간주하고 강력한 대응을 지시했으나 국방부 참모들은 전투 준비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고상한 탈출을 시도하던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우려해 2주간의 고심 끝에 군사행동을 접었다.(‘키신저 외교와 국제정치’, 2020).
54년 전 북한군의 미군 정찰기 격추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최근 한반도의 미묘한 흐름 때문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우리를 처음으로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부르면서 ‘참변까지 당한다면 분명 그것은 자작지얼(自作之孼, 스스로 만든 재앙)’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은 “미 공군 전략정찰기가 동해상에 격추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협박했다. 합참은 미 공중감시정찰자산의 한반도 주변 비행은 영공이 아닌 배타적경제수역(EZZ) 상공에 대한 통상적인 정찰 활동으로 북의 주장은 허위라고 반박했다.
김여정과 북한 군부가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관망하던 미 정찰기의 비행에 대해 갑자기 격추 가능성을 경고하고 최장 비행을 기록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한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6월 29일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반도 해역 진입 가능성에 대한 반발이다. 북한은 “핵탄두를 탑재한 미 전략핵잠수함의 조선반도 전개는 1981년 이후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핵으로 한미 양국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핵잠수함 진입은 핵 균형의 성립으로 북한의 핵 위협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워싱턴 선언에서 논의한 한미핵협의그룹(NCG) 출범 회의가 18일 서울에서 열리는 등 북핵 억지를 위한 대응을 강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전승절이라고 선전하는 7월 27일 정전협정기념일을 앞두고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내부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5월 말 정찰위성 발사 실패 이후 터닝포인트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도발 없이 ‘그럭저럭(muddle through)’ 시간이 가면서 국제 정치에서 잊히는 것은 김정은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때마침 리투아니아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열려 러시아가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ICBM 도발은 북중러 간 연대를 강화하고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북한의 미 정찰기 격추는 역사지만 김정은이 신형 ICBM 화성포-18형을 발사하고 강력한 군사적 공세를 예고한 만큼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육상과 해상을 넘어 EZZ 상공을 분쟁 공간으로 만드는 북한의 도발을 막는 첩경은 강력한 한미 동맹의 확장 억제 전략을 실효적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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