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천년고찰 품은 숲으로 우중산책 갈까요
사찰 둘러싼 1.17㎞ 산책로 ‘티로드’
수령 300년 넘은 비자나무 군락 이뤄
2만그루 차나무 함께 어우러져 장관
비 내리는 날에는 운무에 싸여 몽환적
조선 지리학자 김정호 “차 으뜸은 장흥”
엽전 모양으로 뭉친 녹차 ‘청태전’ 유명
전통 계승하는 다원 찾아 한잔의 여유
올여름 휴가는 코로나19 방역조치가 완화되고 맞이하는 첫번째 휴가로 모두의 기대가 남다르다. 더구나 올해는 무더위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땐 나만의 특별한 휴가지를 찾아 쉼을 얻는 건 어떨까. 숲길을 걸으며 복잡한 도심을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숲 여행지로는 비자나무 사이로 신비로운 차밭이 펼쳐진 전남 장흥 보림사 비자나무숲을 추천한다.
◆1200년 역사의 야생차밭이 있는 비자나무숲=우리나라에서 차 하면 전남 보성과 경남 하동이 먼저 생각난다. 알고 보면 보성 옆 장흥도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차 주산지 가운데 한곳이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보면 전국 19개 다소(茶所) 가운데 13개가 장흥에 있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도 “차의 주산지는 전남이며, 그중 장흥 차가 으뜸”이라고 할 정도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여름날, 보림사로 향했다. 보림사는 장흥읍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야 나오는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자락에 있다. 860년경 신라 때 창건한 천년 고찰인 보림사에는 국보 제44호인 남북 삼층석탑과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여러 보물이 있다. 보림사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사찰을 빙 둘러싼 1.17㎞ 비자나무숲 산책로다. 장흥군에선 이곳을 ‘보림사 티로드’라고 이름 붙였다.
보림사 티로드는 보림사 주차장에서 오른편 길로 가면 된다. 길 입구에는 엽전 모양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는 보림사에서 나는 야생녹차를 엽전 형태로 뭉친 ‘청태전’을 나타낸 것이다. 표지판을 따라 가면 ‘보림백모길’과 ‘보림차약길’을 만날 수 있다. 둘은 이어져 있으니 어딜 가든 걱정하지 마시라. 차이가 있다면 보림차약길이 조금 더 바깥쪽을 돈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비자나무를 만나게 된다. 보림사의 비자나무숲은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 500여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촘촘한 얼레빗 같은 잎사귀가 아늑하고 깊은 숲을 이룬다.
숲길은 그야말로 장대비를 부슬비로 만들 정도로 우거져 있다. 고요한 숲길엔 맑은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하다. 숨을 깊게 마셨다 내쉬며 맑은 공기를 느껴보길. 산책로는 경사가 급하지 않아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쉬엄쉬엄 걷다보면 비자나무 아래로 잡풀 같은 것이 울창한데, 이것이 녹차다. 보림사 녹차밭은 9917㎡(3000평) 규모에 차나무가 2만그루 있다. 보림사의 스님들이 이곳 녹차밭을 관리한다. 그도 그럴 게 이곳 야생녹차의 역사가 곧 사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비자나무와 차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광경이다. 비가 오면 운무에 싸여 마치 비밀의 숲 같다.
차밭 사이로 다소곳하게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면 산책하는 데 30∼40분가량 걸린다. 곳곳에 벤치가 있으니 앉아서 잠시 ‘숲멍(숲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에 빠져도 좋다. 야생녹차밭이 만든 풍경은 어디서 보든 새롭고 신기하다. 숲속에선 빨리 가자고 보채는 사람도 없다. 느긋하게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보림사 뒤편에 다다른다. 비자나무숲이 포근하게 감싼 천년 고찰은 규모는 작지만 아름답다.
임정애 문화관광해설사는 “장흥의 차 문화 역사는 보림사를 중심으로 전승·발전해왔다”며 “통일신라 시대 때 승탑인 동부도도 구경하면 좋다”고 덧붙였다.
◆엽전 닮은 차, 한잔의 여유도=숲속 야생차밭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이번엔 직접 차를 마셔보자. 장흥읍 평화저수지 근처에 청태전을 계승하는 데 앞장선 김수희 대표의 평화다원이 있다. 그는 보림사 스님을 직접 사사해 청태전을 보전 중이다. 청태전은 ‘푸른 이끼가 낀 엽전’이라는 뜻으로 차를 엽전 형태로 뭉친 ‘떡차(병차)’다. 다른 차처럼 덖는 방식이 아니라 야생녹차를 시루에 쪄서 절구에 찧은 다음 틀에 넣어 만든다. 최소 2년 이상 발효해 차 맛이 구수하다.
김 대표는 “옛날엔 청태전을 처마에 매달았다가 감기가 오면 생강이나 돌배를 함께 넣어 펄펄 끓여서 한 사발씩 마셨다”며 “또 장흥 사람들은 멀리 출타할 때 물갈이라도 하면 배앓이를 하니 엽전 같은 이 차를 몸에 꼭 지니고 다녔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8년 청태전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2호로 지정했다. 드넓은 저수지를 바라보며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면 장맛비에 젖은 몸이 녹는다. 다원을 가득 채운 은은한 차 향기에 비로소 마음속 복잡했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안녕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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