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방치 속에 자란 어른아이, 분노 조절이 안 돼요" [정우열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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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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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모님의 방치와 학대로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생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어 괴롭습니다. 가족과의 연을 모두 끊었지만 어린 시절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 이혼하셨습니다. 엄마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아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습니다. 엄마는 저와 한 살 터울의 오빠를 집에 남겨두고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새벽까지 엄마가 들어오지 않아 두려움에 떨던 날이 많았습니다. 의지할 데라곤 오빠뿐이었지만 오빠는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오빠에게 맞는 게 두려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엄마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던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엄마에게 오빠의 폭행사실을 알렸지만 엄마는 '아이들 싸움'이라고 치부하며 개입하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도 엄마의 늦은 귀가와 술주정이 반복됐고, 심할 때는 칼을 들고 저에게 달려들어 입술이 찢어진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제 방은 잠금장치가 없었어요. 술에 취한 엄마가 주정을 하기 위해 들어올 때마다 온몸으로 막았지만 역부족이었죠.
중학생이 됐을 무렵 다시 만난 아빠는 저에게 상처만 줬어요. 술을 마시고 갑자기 전화해 욕을 하거나 집으로 뛰어들어와 저와 오빠를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엄마는 보고만 있었어요. 거기에 오빠의 폭행까지 이어졌죠. 언젠가 학교폭력을 당해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에도 "내가 더 힘들다"며 모른 척했어요. 가족에게 어떤 챙김도 받지 못한 채로 단절된 생활을 했습니다. 집은 '지옥' 그 자체였어요.
대학생이 돼 독립을 했어요.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은 연락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술만 먹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집 보증금 문제가 터지며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렸습니다. 당시 이사를 가야 했는데 보증금 500만 원 중 200만 원이 부족해 엄마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말투는 날이 서있었고 빚쟁이를 대하듯 매몰차게 외면했어요. 마지막에는 구걸하다시피 애원했지만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생활을 하며 모든 비용을 홀로 감당해야 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잠을 줄여야 했어요.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도 가족들에게 전화조차 받지 못했어요. 어느 날은 엄마에게 전화해 묵은 감정을 쏟아냈더니 엄마는 제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사과했고, 300만 원을 보내줬습니다. 그 돈을 보고 허탈했어요. 돈을 다시 돌려보낸 후로 증오에 사로잡혀 살고 있어요.
문제는 그 증오가 가족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향한다는 겁니다. 사람 자체가 밉고 저에게 잘해주는 남자친구에게도 때때로 증오심을 표현합니다. 실수로 누군가 제 어깨를 치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비정상적으로 치솟아요. 그러다 그 사람을 죽이는 망상에도 빠집니다. 독립을 하면서 시작한 '혼술'도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심각해졌어요. 폭음하며 혼자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 일과입니다. 세상에 대한 저의 분노가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결국 저를 극단으로 몰고 갈까봐 두려워요.
엄마와는 연락이 단절됐어요. 가족과도 인연을 끊은 상태입니다. 고아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정말 세상에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는 생각에 막막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남자친구는 좋은 사람이지만 제게 근본적인 위로가 되지 않아요. 제 안의 분노가 타인과의 관계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 살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이를 악물고 알바를 하면서 장학금을 받을 만큼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어요. 곧 졸업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제가 이 고통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걸까요. 이 증오와 울화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보라(가명·26·대학생)
보라씨,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겪었을 외로움과 슬픔, 번민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저며왔습니다. 보라씨가 여전히 겪고 있는 혼란의 근원을 살피기 위해 고통스럽겠지만 조심스럽게 보라씨와 엄마의 관계, 가족 간의 관계를 되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보라씨는 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도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어요.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특히 나를 낳아준 엄마에게 보라씨는 한 번도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존재가 아닌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술을 핑계로 어린 자녀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다가, 상황이 괜찮아져도 방치합니다. 그런 엄마 슬하에서 자라면서 나를 버리지 않을까, 오빠가 나를 때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삶을 예측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보라씨는 그럼에도 혼자 묵묵히 살아냈어요.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며 학업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하며 자기 삶을 지탱해왔죠. 몸과 마음은 힘들었지만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미성숙하고 취약한 엄마, 폭력적인 아빠와 오빠 등 불우한 가정환경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을 눌러둔 채로 말이죠.
그러다 엄마에게 보증금을 부탁한 것을 계기로 깨닫습니다. 보라씨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았지만, 은연중에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이런 엄마의 사랑이라도 받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일을 계기로 억눌러왔던 감정 통제력을 상실했고, 우울감과 분노가 극도로 심해진 것 같아요. 술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과거 보라씨의 엄마와 마찬가지로 보라씨 역시 의지로 음주량을 제어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우울감을 일시적으로 없애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결국 제어가 어려워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잘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지요. 과거의 연을 매듭짓고 내 인생을 시작할 때가 온 거예요. 이를 위해 오랜 기간 억눌러왔던 감정을 마주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어요. 떨쳐버리고 싶은 감정들이 이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고, 지금의 삶에서 이런 부분이 건드려지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해를 넓혀야 합니다. 끓어오르는 '분노' 감정은 보라씨 내면의 취약한 부분이 건드려지면서 나타나는 반응이에요. 분노 자체보다 중요한 건 보라씨 내면에 억눌러온 감정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엄마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쌓인 수치심, 무력감, 두려움, 배신감, 소외감 같은 감정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내면의 갈등에서 오는 결핍감이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이거나 위험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꼭꼭 숨겨왔던 감정이 건드려져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것뿐이에요. 그 감정 자체가 큰 두려움이기 때문에 살짝 드러나기만 해도 너무 아프다 못해 자신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본인이 부모와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을 인정하고,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이 감정을 직면하다 보면 결국 휘몰아치는 감정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때가 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분노 감정 역시 이해하고 수용하면 저절로 조절되게 됩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라씨가 힘든 여건에서도 충실하게 대학 생활을 해온 것처럼 꾸준하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보라씨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놓지 않았고 소중한 남자친구와 관계도 이제 막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 어린 시절 당신이 처한 환경에서 보라씨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삶은 당신이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확인받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
우선 전문가의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보라씨 마음을 수용해주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에요. 여의치 않다면 남자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정을 터놓는 것도 방법입니다. 다만 '기대'를 너무 크게 하지 말고 가볍고 편안하게 소소한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소중한 사람과 사소한 감정부터 나누고, 수용받는 경험을 하며 그 정서적 상호작용의 영역을 넓혀가고 천천히 내면의 힘을 길러가는 그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복잡한 마음들을 조금씩 수용하면서, 가족으로부터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보라씨가 되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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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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