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를 사랑하게 됐다”...알카라스, ‘전설’ 조코비치 넘고 첫 윔블던 정상

박강현 기자 2023. 7. 17.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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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블던 男결승, 전설 조코비치 3대2로 제쳐
알카라스, “꿈이 이루어진 순간”

테니스 4대 메이저 대회(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US오픈) 가운데 최고(最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윔블던의 센터코트는 1922년에 개장했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새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됐다. 왕좌에 오른 주인공은 세계 1위 카를로스 알카라스. 올해 약관(弱冠)의 스페인 청년이다.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5시간 가까운 혈투 끝에 최고가 된 알카라스

‘신성’과 ‘전설’이 맞붙은 남자 단식 결승전이 열린 16일(현지 시각). 알카라스는 이날 혈투 끝에 그보다 16살 많은 노바크 조코비치(36·세르비아·2위)를 세트스코어 3대2(1-6 7-6<8-6> 6-1 3-6 6-4)로 눌렀다. 4시간 42분 만에 커리어 첫 윔블던 우승을 확정짓자 알카라스는 라켓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코트에 엎드려 감격했다. 조코비치와 악수를 나눈 뒤엔 포효했고, 곧이어 관중석으로 달려가 가족과 코치진의 품에 안겼다.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순간 코트에 엎드린 채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이날 경기는 5시간에 가까운 한 편의 테니스 영화였다.

1세트에 ‘신성’은 ‘전설’에 압도당했다. 알카라스는 아직 몸이 덜 풀린 듯 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코비치는 알카라스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34분 만에 알카라스는 1세트를 1-6으로 빼앗겼다. 그는 실책도 9개를 저지르며 조코비치(2개)에 비해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위세는 조코비치의 몫인 것처럼 보였다.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공을 받아내고 있다. /EPA연합뉴스

그러나 2세트부터 알카라스가 살아났다. 특유의 강력한 탑 스핀이 가미된 스트로크와 능숙한 드롭샷을 구사하며 조코비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서브 게임을 한 번씩 브레이크(break)하며 세트는 타이 브레이크에 접어들었다. 이번 대회에서만 타이 브레이크에서 6전6승을 거둔 조코비치에게 유리한 듯했다. 하지만 알카라스는 6-6 동점 포인트 상황에서 2연속 득점하며 2세트를 챙겼다.

상승세를 탄 알카라스는 3번째 세트에서 조코비치를 6-1로 잡았다. 특히 13번의 듀스 끝에 5번째 게임을 따내며 4-1로 격차를 벌렸던 게 별미였다.

알카라스는 4번째 세트를 3-6으로 내줬고, 승부는 최후의 5세트로 돌입했다. 알카라스는 1-1로 맞선 상황에서 조코비치의 두 번째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고 자신의 서브 게임도 지켜내며 3-1로 앞서나갔다. 이후 선배 라파엘 나달(37·스페인·136위)처럼 지치지 않는 풋워크를 선보이고 배짱 넘치는 드롭샷 등을 구사하며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날 알카라스는 서브 에이스(9-2)와 공격 성공 횟수인 위너(66-32) 등 공격 수치 전반에서 조코비치를 제쳤다. 조코비치도 “오늘은 알카라스가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였다”고 엄지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 알카라스(오른쪽)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 이후 진행된 시상식에서 트로피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옆은 노바크 조코비치. /로이터 뉴스1

◇윔블던 ‘빅4′ 시대 종식, 알카라스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윔블던에서 새로운 ‘황제’가 보위하는 순간이었다.

2018년 프로 데뷔한 알카라스는 2023 윔블던 우승으로 2003년부터 20년 가까이 이어져온 남자 테니스 ‘빅4(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조코비치, 앤디 머리)’의 윔블던 ‘싹쓸이’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3년부터 2022년까지 빅4 이외에 윔블던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

특히 이번 우승이 풀세트 끝에 조코비치를 상대로 이뤄낸 위업이라 더욱 돋보인다. 알카라스가 지난해 US오픈에서 커리어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룩했을 때 결승 상대는 카스페르 루드(25·노르웨이·4위)였다. 그래서 ‘빅4′ 시대를 끝내고 있다는 상징성은 두드러지지 못했다.

윔블던 챔피언 카를로스 알카라스(오른쪽)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 이후 진행한 시상식에서 준우승자 노바크 조코비치와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그러나 이번에 마침내 조코비치를 메이저 대회에서 잡으며 향후 테니스계를 이끌어갈 ‘대형 스타’의 탄생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조코비치는 올해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는 등 메이저 대회에서만 23번 우승한 명실상부 테니스 ‘GOAT(Greatest of all time·역대 최고)다. 건재를 과시하며 젊은 선수들을 돌려세우고 있다. 페더러는 이미 지난해 코트를 떠났고, 나달은 내년에 은퇴를 예고했다. 머리는 숱한 부상 끝에 복귀해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나 전성기 시절의 파괴력은 되찾지 못하고 있다.

영화 배우 브래드 피트(앞줄 가운데)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을 관전하는 모습. /로이터 뉴스1

이날 새로운 황제를 보기 위해 수많은 스타들이 몰리기도 했다. 영화 배우 브래드 피트(60·미국), 다니엘 크레이크(55·영국) 및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30·미국) 등이 눈에 띄었다. 빅4 중 한 명인 머리도 직접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기도 했다.

통산 8번째 윔블던을 노렸던 조코비치는 시상식에서 “알카라스는 오늘 폭발적인 서브와 공격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우승할 자격이 충분하다”며 “이젠 잔디에서도 그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의 패배는 아쉽지만, 우리는 이런 순간을 위해 매일 땀을 흘린다”며 알카라스를 축하했다.

노바크 조코비치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 이후 진행된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알카라스는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20세에 내가 이런 자리에 있을 줄 정말 몰랐다”며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나의 팀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어 “조코비치는 내겐 영감(inspiration) 그 자체다. 그가 ‘36세는 이제 26세’라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고 웃으며 “이젠 잔디를 사랑하게 됐다. 계속 나를 여기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16일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에 입맞춤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순박한 미소가 돋보이는 이 약관의 청년이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은 향후 테니스 팬들의 주요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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