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법치경제학 또는 공포경제학
윤석열 정부는 내세우는 뚜렷한 경제정책이 없었다. MB노믹스, 초이노믹스, 소득주도성장 등 역대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용어로 묶을 만한 일관된 흐름을 찾기도 어려웠다. 자유시장경제를 내세웠지만 관치의 입김이 강했다. 감세와 재정건전성을 외치면서도 공공기관 민영화나 작은 정부를 강조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분배는 꺼리지만 그렇다고 성장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초를 찾은 것은 기획재정부의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이었다. 발표자료를 보면 생경한 단어 하나가 나온다. ‘경제법치’다. 당연히 경제학 교과서에 없는 용어다. 정부가 내린 정의를 찾아보니 ‘경제 전반에 법에 근거한 공정 시장경제 질서 확립’이란다. 이른바 ‘법치경제학’이다. 굳이 찾자면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듯한데 박근혜 정부에서도 노골적으로 경제에 법치를 끌어오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윤석열 정부의 경제철학은 모호하지만 경제운영 방법은 일관성이 있다. 경제주체들의 선택을 이끌어내는 데 감찰·사정기관, 세무기관, 감독기관 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대출금리가 높다는 지적이 나오자 금융감독원은 시중은행에 공개적으로 금리 인하를 요구했다. 사교육 카르텔 문제가 불거지자 입시학원에 대해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공정거래위원회는 과장광고 등에 대한 현장조사에 나섰다. 현대차, 카카오페이, 쿠팡, 호반건설 등은 이런저런 이유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러니까 국세청과 공정위는 민간기업의, 감사원은 공공기관의, 금융당국은 은행과 증권사의 ‘보이는 손’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검경이 있다.
나쁜 짓을 했다면 수사당국의 수사를 받는 것이 맞다. 문제는 상식적 수준을 뛰어넘는 사례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사교육 카르텔로 ‘킬러 문항’을 지적한 것을 비판한 한 유명 일타강사는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납세자연맹은 “만일 국세청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무리하게 일벌백계식 세무조사에 착수하거나 또는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 세무조사를 진행한다면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세무조사가 무서워 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하기 어렵게 돼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법치의 서슬에 최근 접한 민간기업과 공공기관, 금융사는 바짝 엎드려 있었다. ‘경제법치’가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부의 선한 의도(?)와 달리 경제주체들은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정부의 밀가루와 라면 가격 인하 ‘권고’에 업계가 즉각 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는 이어 유업계에도 우윳값 인상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는 19일께 결정되겠지만 유업계도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권 카르텔’로 낙인찍힐 경우 앞으로 남은 기간이 괴롭다.
경제법치의 상징적인 장면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지난 15일 대한상의 제주포럼 참석이었다. 한 장관은 법무부 장관으로는 이례적으로 경제인 모임에 참석했고, 기업인들은 그와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희한한 것은 시장의 자율경쟁을 강조하던 보수경제학계의 침묵이다. 정부의 노골적인 물가 간섭, 경영 간섭에도 보수경제학자들은 입을 꾹 닫고 있다.
하지만 경제법치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정부 2년차 막강한 힘에 경제주체들이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늉만 내는 선에서 그칠 가능성이 크다. 라면업계는 50원 ‘찔끔’ 가격을 내리는 식으로 정부의 요구에 화답했지만 이 정도로는 소비자가 가격 하락을 체감하기 힘들다. 자본은 권력보다 교활하고, 생명력이 더 길다.
이권 카르텔을 혼내는 정의의 사도는 당장 여론의 지지를 받겠지만, 오래가기는 힘들다. 정권은 아무리 길어도 5년밖에 못한다. 힘에 의한 경제운영은 힘의 균열이 생길 때 급격히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기의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을 위해 행사하는 공포는 좋은 공포”라고 했다. 하지만 ‘좋은 공포’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공포가 나에게 향하는 순간 여론은 돌아섰다. 오히려 그는 “자유를 위해 자유를 없앴다”(한나 아렌트)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경제법치가 강조될수록 ‘보이지 않는 손’은 위축된다. 그럴수록 윤석열 정부가 강조해온 자유시장경제와도 거리가 멀어진다. 시장이 공포를 느낀다면 더더욱 그렇다.
박병률 경제부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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