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군인에 의료비 지원 말라”… 軍까지 튄 美 이념전쟁
내년도 미국의 국방 정책을 결정하는 국방수권법(DNAA)의 처리를 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하원이 다수인 공화당이 낙태와 동성애 관련한 각종 제한 규정을 포함시키자 상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반발하면서 최종 통과되지 못하고 장기 표류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보수·진보 진영의 이른바 문화 전쟁이 초당적 영역이었던 안보 분야까지 옮겨붙으면서 세계 최강군을 자부하는 미국의 국방 정책이 올스톱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 하원은 지난 14일(현지 시각) 8860억달러(약 1127조원) 규모의 미 국방 예산·지출 및 정책들을 담은 NDAA 수정안을 찬성 219표, 반대 210표로 가결했다. 비록 통과는 됐지만 국방수권법 표결이 이처럼 찬성과 반대가 팽팽하게 엇갈리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번 표결수는 공화당(222석)이 민주당(212석)에 근소하게 앞선 현재 의석 구도와 거의 일치한다. 공화당이 주도한 수정안에 민주당이 반대하는 구도가 표결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양당의 지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주요 법안을 두고 ‘정치 난투극’이 벌어졌다”고 했다.
미 정치권은 국방·안보를 당과 이념을 떠난 초당적 사안으로 인식해왔다. 이 때문에 양당은 매년 상·하원에서 합의와 토론을 통해 이견을 좁혀가며 합의안을 만든 뒤 순조롭게 통과시켜왔다. 이런 국방수권법에 대해 갈등이 벌어진 것은 정작 안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성소수자·낙태 문제 때문이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공화당은 내년도 국방수권법 수정안에 예전에는 없던 금지 조항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먼저 원정 낙태 시술을 받는 군인에게 일부 비용을 지원하는 국방부 정책을 중단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작년 6월 연방 대법원이 임신 6주 이내 낙태를 자유롭게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면서 국방부는 낙태가 금지된 주(州)에 거주하는 여군이 낙태하는 데 필요한 여행 경비를 지급해왔는데 이에 제동을 건 것이다.
공화당은 또 성전환자 호르몬 치료 등에 대한 의료보험 지원을 중단하고, 군내 인종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군내에서 ‘드래그쇼(여장 남자쇼)’ 공연을 하거나 ‘비판적 인종 이론(CRT)’을 교육시키는 것도 금지한다는 조항도 넣었다. CRT는 인종차별이 백인 우월주의에 뿌리를 둔 법과 제도 등 구조적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론으로 민주당 내 강경 진보 세력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워싱턴포스트는 “공화당이 보수적 가치를 위해 싸운다며 전방위로 벌이고 있는 문화 전쟁을 군 분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공화당의 행보는 여성의 낙태의 자유와 성 소수자 권익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온 조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의 반발을 불렀다. 캐서린 클락 민주당 원내총무는 CNN 인터뷰에서 “공화당이 안보 분야에서 극단 이념을 부추기고 있다”고 했고,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군인들에 대한 의미 있는 투자가 돼야 할 법을 무모한 입법 폭주로 바꾸고 있다”고 했다. 백악관은 이 법이 최종 통과될 경우 대통령 거부권 행사 가능성도 시사했다.
반면 공화당은 이번 법안 통과를 통해 군이 ‘미국 방어’라는 본연의 기능에 더 충실하게 됐다는 입장이다.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총무는 수정안 하원 통과 뒤 “이 법은 미군이 국방부 내부에서 벌어지는 온갖 (좌파 이념) 주입 시도가 아니라 해외의 적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미국인들에게 중요한 승리”라고 했다.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이번 법안은) 납세자가 낸 세금을 낙태에 쓰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디즈니랜드가 우리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매카시 하원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기강이 해이해진 군기를 확립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최근 성소수자와 다양성을 중시한 콘텐츠를 강화하면서 보수 진영과 갈등을 빚어온 월트 디즈니를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원을 통과한 국방수권법을 두고 공화·민주당의 입법 전쟁은 상원에서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상·하원에서 각각 수정안을 의결한 뒤 양원이 절충을 통해 단일안을 마련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하원과 정반대로 상원은 민주당이51대 49로 근소하게 다수당인 데다 가부동수 시 캐스팅 보트를 쥔 상원의장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다. 현재 하원 수정안이 원안대로 제정될 가능성이 제로라는 얘기다. 국방 예산 집행에 차질이 없으려면 2023 회계연도 마지막 날인 9월 30일 이전에 합의안이 의회를 통과해야 한다. 협상이 난항을 겪을 경우 국방 정책이 올스톱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0월에 광범위한 셧다운(예산안 미책정으로 인한 정부 폐쇄 사태)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의회가 새로운 ‘벼랑 끝 싸움’에 휘말리게 됐다”고 했다.
☞국방수권법(NDAA)
미국의 국방 정책과 당면한 안보 문제 등을 명시하고 분야별 예산을 책정한 법률로 1961년 제정했다. 국방 정책 특성상 1년 유효기간을 갖는 한시적 법률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의회에서 매년 양당 합의를 거쳐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존속돼 왔다. 국방 정책의 우선순위, 병력 수준과 무기 체계, 군사작전의 정책 등 군과 관련한 모든 분야가 망라돼 있어 가장 중요한 안보 관련 법으로 꼽힌다. 현재 주한 미군 규모(2만8500명) 등 한반도 관련 사안도 이 법에 규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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