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소금빵을 먹는 시간
남항을 바라보며 백일장 심사위원들과 소금빵을 나누어 먹는다. 빵을 벌러 가는 일이 고대 로마에서는 소금을 벌러 가는 일이었다. 소금과 봉급의 어원이 같다. 봉급으로 받은 소금을 팔아 밀을 사고 빵을 만들고, 소금을 저금하거나 빌려주기도 했을까. 소금은 의식주에 필요한 살림으로 바꾸기에 빠듯하거나 모자랐을 것이다. 들어온 흔적 한 줄 통장에 남기고 빠르게 녹아 없어지는 월급이 그러하듯.
소금의 사용가치는 갑 중의 갑이다. 빛의 반려가 될 정도이다. 생명작용의 필수요소이다. 다행히 소금은 모두에게 평등한 재화로 진화되었다. 소금은 사용가치에 비해 교환가치가 낮다. 이 시점에 소금 사재기라니. 혼란스럽다. 소금의 교환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다가 처한 위기에서 오는 불안이 문제다. 소금은 바다에 대한 불신과 불안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이 사용하는 에너지는 급속도로 증량 중이다. 생명의 바다가 욕망 시행착오의 배출구로 전락하고 있다. 파괴와 몰락을 향하는 엔트로피는 증가일로에 있다. 바다가 실패한 욕망의 치명적 폐기물 오염수 투기장으로 홀대받을 참이다. 과학적 판정과 상관없이 소금 사재기는 이런 불안의 현상적 표현이다.
남항이 내다보이는 영도 카페는 수리조선소 사무실로 사용되던 곳이다. 소금을 벌기 위해, 밥을 벌기 위해, 바다로 나갔다가 늙고 병들어 돌아온 배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등짝에 하얗게 소금꽃 핀 인부들의 망치에 세게 얻어맞으며, 깡깡 아픈 비명을 내질렀을 것이다. 대양을 항해하던 기관과 방향타를 점검받고, 긴 항해에서 달라붙은 녹과 조개껍질을 떼어내는 대수선을 받고, 때깔 고운 새 페인트 옷 한 벌 갈아입었을 것이다.
배의 중요 장치 부품 한 점이 카페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가로 세로 높이 각각 일 미터 남짓 크기의 이 장치는 배를 수리해서 밥과 소금을 벌었다는 이 장소의 비망록이다. 사적으로 남긴 생활역사의 한 점 유물이라 할까. 시간이 달라지면 공간은 역할이 달라진다. 시간은 기록되거나 남겨져서 역사가 된다. 빵과 커피의 시간의 표층 아래 배의 시간의 지층이 묻혀 있다. 저 장치 혹은 물목이 없다면 배와 수리의 지층은 곧 잊혀질 것이다.
겉이 딱딱한 소금빵 안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짠맛도 단맛도 없다. 구멍은 버터조각이 녹은 자리다. 버터빵이라 불려야 할 것 같은데 소금빵이다. 어떤 이름은 내부에 충분히 들어있어 얻는 것이 아니다. 모자람, 결핍 혹은 어울림으로 얻는다. 간이 심심하니 소금을 조금 찍어 먹는다. 담백하고 밋밋한 맛이 에스프레소와 잘 어울린다, 짠맛은 단맛을 상승시킨다. 단팥을 만들 때 소금을 설탕과 함께 넣는 이유다. 달고 짠맛에 대한 단짠기호가 늘어나지만 설탕과 소금이 조금 모자란듯한 싱거움과 심심함이 권장된다.
짜다 싱겁다 심심하다는 소금에서 출발해서 사람과 시간으로 확장된 말이다. 짜다에는 인색함과 알뜰함이라는 양가적 뉘앙스가 들러붙는다. 일 매무새가 빈틈없이 확실하고 단짠한 사람, 진지함에 농담을 섞는 싱거운 사람, 있는 듯 없는 듯 심심한 사람이 있다. 아무도 안 웃는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고 재미없는 잡념 구멍이 많은 나는 소금빵인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어떤 맛이 잃어버린 시간과 떠나간 사람들을 파노라마처럼 불러오는 특별한 감각의 이미지가 된다. 오늘 영도에서 나누어 먹은 소금빵과 커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홍차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문득 남항 풍경과 함께 오늘의 시간과 사람을 불러오게 될까. 때로 잔잔하게 빛나는 고요한 바다의 윤슬과 함께, 때로 방파제에 서서 흠뻑 젖은 온몸으로 태풍의 위력을 보도하는 방송기자를 삼켜버릴 듯 몰아치는 파도와 함께. 눈물과 땀과 피와 바다. 아름다운 물에는 소금이 들어있다. 마음이 부패를 모르는 소금독이라면 좋겠다. 사랑 희망 믿음 환희 진실 정의 양심을 넣고 소금으로 덮어두면 변치 않는 마음의 소금독에서 소금빵 생지 같은 청춘과 사랑이 추억으로 발효되기를.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