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환상 속의 그대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발표된 지 30년이 지난 노래인데도 적재적소의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정신적으로 강인할 뿐 아니라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적 역량을 갖춘 한국의 청년 여성들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가 그런 순간이다.
이를테면, 파충류와 조류에서는 종종 관찰된다지만 인간 여성이 단성생식으로 출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 한국 여성들은 이미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아 유기, 영아 살해 같은 끔찍한 사건 보도에 어떻게 줄곧 ‘친모’만 등장할 수 있겠는가.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유기하는 것도, 모텔 화장실에서 원룸에서 홀로 출산한 아기를 방치하는 것도 모두 여성들이다. 게다가 이들은 화장실에서 혼자 출산을 하더라도 벌떡 일어나 아기를 병원에 데려갈 정도의 신체적 역량과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고 있다.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아이 하나쯤은 혼자 거뜬히 키워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한국 여성이다. 이렇게 유능한데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고 법적 처벌도 피할 수 없다.
한국 여성은 각자도생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에도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임신중지가 더 이상 불법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체계도 없는 상황이 몇 년째 지속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까지 된 내과적 임신중지 약물은 아직 국내에서 처방받을 수 없다. 정식 수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외과적 시술의 경우에도 여전히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어떻게 이 문제에 대처해나가고 있는지 실태 파악도 충분하지 않다. 보건복지부와 국회는 그저 느긋하고, 여성들은 낙태죄 폐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방식으로 어려움을 각자 헤쳐 나가는 중이다. 왜? 그들에게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가 하면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주 52시간이라는 노동시간 상한 규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해 속상하다는 MZ세대 노동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빈자리를 여성 청년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밝은 표정으로 나타나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그 돈으로 구입한 멋진 샤넬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해외 여행길에 오르는 이들이다. 고용센터를 방문할 때 스타벅스 커피까지 들고 갔더라면 좀 더 완벽한 그림이 나왔을 텐데 이걸 놓친 점이 못내 아쉽다. 이들은 고용보험제도에 대한 지식도 탁월하여, 몇 달만 일하고 ‘시럽 급여’를 받으며 편하게 살아가는 노하우를 알고 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흔하며, 사측의 인원 감축이나 계약만료 등으로 인한 실직이 더 많다는 것, 실업급여의 기준이 되는 임금액이 더 낮다는 등의 객관적 지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 청년 여성 노동자는 그깟 어려움에 쉽사리 꺾이지 않는다. 미국의 복지퀸이 복지수당에 ‘의존해’ 살아가는 가난한 동네의 흑인 싱글맘이라면, 신흥 K복지퀸은 실업급여를 ‘즐기는’ 청년 미혼 여성이다. 공자께서도 일찍이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하셨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나날이 심화하고 일자리는 더욱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구조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국가는 특히 청년 여성을 겨냥하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모양새다.
문제는 그 청년 여성이 현실이 아니라 그들의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대의 환상, 그대의 마음은 위험하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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