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나이 듦의 미학
일본의 각본가 유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곧 죽을 거니까’에 나오는 주인공 히나 여사는 나이가 드는 것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 히나 여사는 젊어 보이려고 나잇살이 찌지 않도록 매일 가벼운 운동을 하고, 흰머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염색도 하고, 최신 패션 유행도 놓치지 않고 옷도 계절별로 사 입는다. 이토록 철저한 자기 관리로 외모를 가꾸는 멋쟁이 히나 여사의 삶에 복잡한 가정사라는 풍파가 찾아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젊게 관리한 외모가 아니라 그녀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경험이란 지혜였다. “중요한 건 내면이 아니라 외면이야”라고 소설 내내 주장하는 히나 여사의 말과는 달리 나이가 들지 않고서는 결코 깨닫지 못하는 지혜가 있었다.
나 역시 소설의 주인공 히나 여사처럼 ‘나이 먹는 일’ 자체를 진심으로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나이가 드는 것도 싫고, 늙어 보이는 것도 싫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 역시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근 사업차 만났던 한 젊고 유능한 청년을 통해 나이가 드는 것이 반드시 나쁜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내가 깨달은 ‘나이듦의 세 가지 미학’이다.
첫째, 지나온 과정이 있기에 보이는 것이 있다. 일 관계로 만난 상대는 나보다 훨씬 젊고 매우 유능했다. 그러나 일 처리를 하는 과정은 매우 이기적이고 서툴렀다. 그간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경험했기에 상대방의 배경이나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동업하는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상대방의 본심이 훤히 보였다.
둘째, 지나온 과거를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이 있다. 자기에게만 유리한 계약을 맺자고 하는 상대를 보며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짝 불쾌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내 내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상대방의 행동을 통해 사회 초년생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그땐 나도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자,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서둘러 성공하고 싶어 하는 조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누그러졌다.
셋째, 보이고, 이해하니 여유가 생긴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아마도 상대방의 말을 들은 즉시 잘못을 조목조목 따졌을 것이다. 여기서 더 어렸다면,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 못 하고 불공정한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비해 많은 것이 보이고, 이해가 되는 지금 나에게는 꽤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결국 나의 권유와 조언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한 이득이 되는 계약을 맺게 됐다.
나이 듦을 굳이 미학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세월을 통해 얻은 지혜가 아니었다면 상대방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며 상처를 주거나, 비즈니스를 멀쩡히 성사시키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거래가 성사될 수 있었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는 ‘멋지게 늙은 사람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말을 했다. 더 살았기 때문에 보이는 것, 더 아는 것, 그로 인해 생기는 여유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만 알고 있는 이 미학을 통해 우리 관계를 더 풍성하게 가꾸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예술가가 돼 보는 것은 어떨까? 숙성된 좋은 와인이 더 사랑받는 것처럼 우리도 나이가 들어감을 더 즐겁게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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