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국익 위해 우크라 외면하라?
지난 5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머물면서 10여 차례의 야간 폭격을 경험했다. 새벽 서너 시면 어김없이 공습이 벌어졌고, 숙소와 지하 대피소를 오가는 일을 하룻밤에도 수차례 거듭했다.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당시의 경험은 여전히 뇌리에 남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면 머리 위에서 폭발하는 미사일의 굉음과 섬광, 대피소로 이어지는 긴 계단이 떠오른다. 귀를 틀어막고, 커튼을 이중으로 친 뒤 맥주 잔에 독주를 따라 쭉 들이켜고 쪽잠에 든다.
윤석열 대통령의 키이우 깜짝 방문 소식에, 대피소에서 마주한 공포와 피로에 찌든 얼굴 등을 떠올렸다. 전쟁 중인 국민의 삶이란 아무리 나아 봐야 그런 것이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도 매일 밤 폭격으로 죽고 다치는 이들이 나온다. 집이 파괴되고, 부모 형제나 자식을 잃은 이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두 팔과 두 눈을 잃고 전장에서 돌아 온 남편을 꼭 껴안은 우크라이나 여인의 표정에서 그들이 마주한 슬픈 현실을 본다.
한국인들은 70년 전 이보다 더한 경험을 했다. 말 그대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고 불구가 됐다. 파괴된 도시와 국토를 재건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는 우크라이나인의 고통을 공감 못 하는 이가 많아 보인다. 국제 사회로부터 “우크라이나를 돕자”는 호소가 쏟아지는데도 “국익을 위해 외면하라”는 주장이 유명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다. 언론에도 여기저기 같은 취지의 글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이곳 유럽에도 우크라이나 지원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다. 일부 한국 정치인마냥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인정해야 한다”며 “지금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이도 있다. 이 전쟁이 ‘서방의 대리전’이란, 익숙한 음모론적 해석도 넘쳐난다. 하지만 유럽인 대다수의 기본 입장은 명쾌하다. 어떤 해석과 의견이 있든 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며, 자유와 생명, 주권을 지키려 싸우는 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에는 장황한 논리가 필요없다. 약간의 정의감과 윤리 의식이면 충분하다.
우리 사회의 ‘정의’와 ‘윤리’ 기준에 어떤 왜곡이 생긴 게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제의 강제 징용, 위안부 만행에는 바로 어제 일처럼 격분해도, 6·25 전쟁에서 벌어진 국제적 침략 행위의 만행과 고통에는 침묵한다. 그 전쟁을 냉정하게 되돌아보려는 시도는 독재 옹호, 친일 면죄, 전쟁 부추김 등으로 매도된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 국민의 억울하고 딱한 사정마저 쉽게 외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70년 전 세계 16국의 도움으로 겨우 패망을 면한 나라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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