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자율화가 킬러 문항을 없앤다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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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은 좋은 글이었지만 매우 추상적으로 쓰여서 전체 논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괄호 안의 그 대목에서 필자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출제자는 이것들을 언어와 과학, 수학 영역을 포괄하는 융합형 문제라고 했지만, 교육부는 무책임한 '킬러 문항'이라고 했다.
한 영어학 교수는 킬러 문항의 수준이 까다롭다고 알려진 미국 대학원 입학능력시험(GRE)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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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당면한 기후 문제를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성의 관점에서 다룬 150자 정도의 영어 지문을 읽고 괄호 안에 적합한 말 고르기(2023학년도 수능 영어 34번).
지문은 좋은 글이었지만 매우 추상적으로 쓰여서 전체 논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괄호 안의 그 대목에서 필자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우리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농게의 게딱지 폭과 큰 집게발의 길이의 연관 관계를 수리적으로 추정하는 진술문 중 적합한 것 고르기(같은 해 국어 17번).
언어적 이해력은 물론, 편차제곱 합과 L-그래프에 대한 수리 개념 지식과 응용력이 필요한 문제였다. 짧은 시간에 이런 문제의 정답을 찾아내는 일에는 훈련된 수험생이 대학교수보다 더 유능하다.
출제자는 이것들을 언어와 과학, 수학 영역을 포괄하는 융합형 문제라고 했지만, 교육부는 무책임한 '킬러 문항'이라고 했다. 경쟁에서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나 혼자 살아남는, 기회의 문제라는 의미인 것 같다. 한 영어학 교수는 킬러 문항의 수준이 까다롭다고 알려진 미국 대학원 입학능력시험(GRE)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킬러 문항의 정답률은 오지선다 질문의 평균 정답률인 20%를 크게 밑돈다.
수능시험 문제가 좀 쉬워져야 한다. 쉽다고 의미 없는 문제가 아니다. 원래 '오지선다(多)'는 '오지선답(答)'이 아니다. 즉 하나의 정해진 답이 아니고, 가장 타당해 보이고 적합한 답을 고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이 정답률을 입결의 직접 지표로 사용하기에, 수험생들은 강박적으로 정답을 찾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파고든 것이 킬러 문항 전문 사교육이다. 학원마다 킬러 문항을 만들고, 심지어 외부에 공모도 하고 있다. 수험생들이 고액의 사교육비를 부담하며 쌓아 가는 내공에는 오답으로 가는 길의 갖가지 유혹을 피하는 방법, 정답 맞추기 요령과 테크닉이 포함된다. 이건 정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최상위권 대학이라 불리는 몇몇 대학과 의과대학 입결을 위한 줄 세우기에 쓰이는 킬러 문항이라면 더욱 문제다.
사교육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이권 카르텔을 용납할 수 없다는 대통령과 교육부의 문제 제기에 절대 공감한다. 그러나 사실 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다. 대학이 학생을 선발해서 교육하는 전 과정에 전적인 자율성을 갖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선결과제다. 대학이 수능 성적표를 하나의 참고지표로만 사용하고, 각자의 설립이념과 교육철학에 맞는 인재 발굴에 나서면 문제는 풀린다.
대학이 이를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데도 이유는 있다. 수능 점수에 의한 입결이 대입 공정성 시비라는 예민한 이슈에 휘말릴 우려가 없는, 가장 안전한 운행이기 때문이다. 입학제도가 바뀌어도 사교육 불패 신화는 계속되리라는 자조적 우려도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학은 줄 세우기 방식의 수능성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또한 대학 스스로도 이제는 서열에 맞춰 안주해 온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대학이 투명하고도 합리적인 대학입학 표준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성실히 실행해 수험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정부는 대학의 자율성이라는 큰 방향만을 제시하고, 입학을 포함한 교육에 관한 전권을 대학에 이양해야 한다. 그리고 조건 없는 국가 재정으로 대학을 도와주면 된다. 그래야 킬러 문항이 필요 없게 되고, 보편적 공교육이 살아나고, 사교육 이권 카르텔이 무너지고, 가계 재정이 안정되고, 결국 이 사회의 미래에 희망이 보일 것이다. 우리 소중한 자녀세대의 미래를 살리는 새로운 경쟁의 장을 대학이 열어 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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