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선량한 마음 [무비줌인/임현석]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2023. 7. 16.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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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멘탈’ 속 불 원소 엠버(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가 서로 모여 살아가는 도시(엘리멘트 시티)가 배경이다. 사회에서 배척받는 불 원소 소속 여성 ‘엠버’와 도시 주류인 물 원소 소속 남성 ‘웨이드’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이 칼럼에는 영화 ‘엘리멘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영화는 서로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물과 불 원소가 서로 화합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엠버의 부모는 불 원소만 모여 살던 파이어랜드를 떠나온 이민자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엘리멘트 시티에서 배척받아 온 것으로 묘사된다.

엠버 가족은 불 원소가 모여 사는 도시 내 커뮤니티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오랜 세월 신산한 삶을 버텨낸다. 엠버 가족에겐 가게는 삶의 근간이자 자부심이다. 그러나 다른 주류 원소들 눈엔 무턱대고 세운 비인가 건물에 불과하다. 영화는 물 중심 사회에서 불 원소가 받는 은근한 차별을 비춘다.

엠버 가족은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의 삶과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한국계 이민자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와 배경과 성향이 다른 두 집안과 자녀들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 내지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섞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엘리멘탈은 익숙한 구조를 차용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독창적이다. 연출과 작화 면에선 원소별로 특징을 잡아채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이야기 면에선 차별받는 소수자의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배경과 성향이 다른 집안을 그리는 영화들은 선한 자녀와 대별되는 가문 간의 극한 대립을 통해 극을 끌고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영화는 이러한 전형성에선 벗어난다.

엘리멘탈에서 웨이드의 가족은 엠버를 극진히 환대한다. 엠버의 가족은 웨이드에 대한 적개감을 보이지만 이는 극 안에서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돼 있다. 웨이드에 대한 반대 감정은 증오나 혐오 감정에 기반한다기보다는, 오랜 차별 속에서 익힌 엠버 부모의 생존 감각 내지는 주류 사회에서 상처받을 자녀를 우려하는 마음처럼 보인다. 적개감은 견고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로 가족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가문 간이 아니라, 엠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엠버는 타국에서 억척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일궈낸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강하게 내비치며, 가게를 물려받는 것으로 가족이 바라는 삶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만의 창의성을 인식하며, 불 원소 커뮤니티를 벗어나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에 따라 자아를 실현하려는 마음도 있다. 두 감정은 엠버의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그리고 내면에서의 혼란은 극의 막바지까지 이어진다.

영화 속 세계관 설정은 한국계 이민자 2세대인 영화감독 피터 손 개인의 경험이 반영돼 있다. 손 감독도 196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현지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림에 대한 재능을 실현하고 싶던 손 감독 또한 가게를 물려받길 원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고. 그는 이 과정에서 이민 2세대로서 한 사회 안에서 각자의 배경과 성향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융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민자 자녀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이야기가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한 신중함과 섬세함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에선 등장 캐릭터 누구 하나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대립하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사회에 적대할 만한 존재를 정하고,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만으로 좋은 삶이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차별도 직시하면서 동시에 개인 차원에서의 작은 실천 또한 중요하다고 소박하게 다룬다. 이는 구조의 문제를 너무 손쉽게 개인화하고, 미시적으로 처리했다는 비판을 들을 지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선량한 태도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에 무방비로 턱없이 공감하고 싶어진다. 우리 안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키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닿아서가 아닐지.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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