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고 싶은 인간, 인간이 되고 싶은 고깃덩어리[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3. 7. 16.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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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인간과 짐승의 만남
패션잡지 보그 촬영 사진을 찍는 프랜시스 베이컨. 자신의 작품처럼 작가 본인이 고깃덩어리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 출처 뉴크라이티어리언 홈페이지
“돼지야!” 누군가 당신을 부른다. 자,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날씬한 몸이 인기 있는 요즘, 사람들은 대개 날씬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게 비록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따라서 살찐 존재의 대명사 “돼지”는 긍정적인 함의를 띠기 어렵다. 그러나 돼지는 귀엽기도 하다. 특히 아기 돼지가 그렇다. 잘 씻은 돼지는 보송보송하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이 돼지야…”라는 말은 애정 표현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산들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저녁, 연인 옆에 누워 살며시 그의 볼을 잡아당기는 거다. 그윽한 시선을 하며 속삭이는 거다. “이 돼지야….” 이것은 애정 표현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러나 돼지고기는 다르다. 돼지와 달리 돼지고기라는 말은 애정 표현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누군가 당신을 돼지도 아니고 돼지고기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싸우자는 얘기다. 크게 싸우자는 얘기다. 러브레터를 쓸 때, 경우에 따라 “사랑하는 나의 돼지에게”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제발 “신선한 나의 돼지고기에게”라고 시작하지는 말기를. 그랬다가는 돼지갈비로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돼지고기”는 “돼지”보다 모욕적이다.

돼지는 살아 있고, 돼지고기는 죽어 있다. 돼지는 생물이고 돼지고기는 사체이다. 인간은 대개 죽기보다는 살고 싶어 한다. 그뿐이랴. 인간은 때때로 인간 이상이 되고 싶다. 신을 향하고 싶다. 인간은 신처럼 완전한 존재는 아닐지라도, 신성을 약간이나마 가져 보고 싶어 하는 존재다. 한갓 식욕과 성욕에만 휘둘리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그 영혼 때문에, 인간은 짐승을 넘어 한 발자국 신에게 다가간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깃덩어리와 인물’. 교황이 고깃덩어리 사이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담았다. 사진 출처 미국 시카고미술관 홈페이지
영국의 예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생각은 다르다. 누군가 인간의 영혼 운운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개자식!” 베이컨이 보기에 인간은 신을 향하는 존재이기는커녕 한갓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정육점에 가면 나는 언제나 놀라요. 왜 내가 아니고 저 동물이 저기에 걸려 있지.” 실로, 베이컨은 고깃덩이에 열중했다. 히틀러가 런던을 폭격했을 때 베이컨은 파괴된 건물에서 짓이겨진 시체 옮기는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죽고 나면 비닐봉지에 넣어 도랑에나 던져버려.”

인간과 신은 언제 만나는가. 기도할 때 만난다. 신을 갈구할 때 만난다. 인간이 육체에 갇히지 않고 영혼에 접속할 때 만난다. 그렇다면 인간과 짐승은 언제 만나는가. 인간이 육체의 쾌락을 느낄 때 만난다. 맛있는 음식에 몰두할 때 만난다. 성적 쾌락에 탐닉할 때 만난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먹고 교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음식을 섭취하거나 상대의 몸을 탐할 때 생기는 쾌락을 통해서 인간과 짐승이 하나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18세기 독일의 작가 카를 필리프 모리츠(1756∼1793)의 생각은 다르다.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인간과 짐승이 만난다. 짐승이 고통받을 때 그 짐승은 인간이며, 인간이 고통받을 때 그 인간은 짐승이다. 그렇지 않은가. 짐승에게 무심하던 당신도 짐승이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한다면 그 짐승에게로 감정이 이입될 것이다. 혹은, 당신이 고통을 못 이겨 고함지를 때 당신도 별수 없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짐승임을 자각한다. 고통받을 때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짐승이라니. 너무 세속적으로 들리는가. 그렇지 않다. 베이컨은 고깃덩이야말로 종교적이라고 보았다. 베이컨이 쾌락을 매개로 해서 짐승, 아니 짐승의 고깃덩이와 만났다면 그는 속된 차원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는 쾌락이 아닌 고통을 통해서 고깃덩이와 만난다. 베이컨은 고통을 반긴 사람이었다. 피학적 성애에 탐닉한 사람이었다. 다수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타락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에게 성행위는 종교적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육점에 걸려 있는 갈비짝을 보며 십자가를 상상하곤 했으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베이컨은 고깃덩어리 사이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교황을 그리기도 했으니까. 신성모독인가? 베이컨은 이것이야말로 종교적이라고 대꾸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 짐승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다름 아닌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그런 짐승이다. 우리는 인간세계를 원했던 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다름 아닌 환웅이 그런 신이다. 우리는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영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이 바로 그런 인간이다. 베이컨을 통해서 고깃덩이가 되고 싶어 한, 혹은 자신이 고깃덩이임을 자각한 인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김범의 ‘잠자는 통닭’. 작가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 고깃덩이를 보여주는데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잠들어 있던 인간의 정신이 깨어나는 듯하다. 사진 출처 네이버 카페 ‘작가 김범 사랑’
작가 김범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 신이나, 신이 되고 싶어 한 인간이나, 인간이 되고 싶어 한 동물이나, 동물이 되고 싶어 한 인간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 고깃덩어리다. 그의 2006년 작 ‘잠자는 통닭’에는 잘 익은 통닭 한 마리가 잠들어 있다. 베이컨이 인간이 고깃덩어리라는 사실을 일깨웠다면, 김범은 고깃덩이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지금 먹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고깃덩이가 아니라, 접시를 침구 삼아 고이 잠든 고깃덩이를 보고 있다. 고이 잠든 그 고깃덩이를 응시하면서, 그간 잠들어 있던 인간의 정신이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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