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기 박사 “다시 돌아가도 아프리카 선택… 기근 해결 도울 것” [차 한잔 나누며]
서울대 교수·英 연구 기회 포기
나이지리아 行… 구근작물 연구
잦은 내란 속 유서 써놓고 출장
내병성 강한 카사바 개량 성공
阿 후학 양성… 추장 추대되기도
“연구 못하지만 페북으로 소통”
“다시 돌아가도 저는 아프리카를 선택할 겁니다.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가뭄으로 농사를 망쳐 고통받는 농민들을 보고 자라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보다 더한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를 돕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죠.”
한 박사는 중학교 2학년인 첫째 딸은 진학 문제로 제자 부부에게 맡기고 아내와 6, 10, 12세 삼남매를 데리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선택한 국제열대농학연구소(ITA)는 전세계 세번째로 생긴 농학연구소로, 미국 포드 사와 록펠러재단으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아 나이지리아 최대 도시 이바단에 설립됐다. 그의 임무는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카사바와 얌(마), 고구마 품종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잦은 내란과 치안 불안 속에서 빈번하게 출장을 가야했고, 떠날 때마다 유서를 써놓고 갔다. 다행히 카사바 원산지인 브라질에서 야생 종자들을 가져와 내병성이 강한 종자를 찾았다. 브라질 야생종 컴피넌스와 나이지리아 재래종을 교배하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강한 교배종을 걸러내는 작업을 했다. 교배에 성공한 1976년 나이지리아 국영지 ‘데일리 타임즈’ 1면에는 ‘More Gary For You’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에 실렸다. 한 박사의 연구로 바이러스 문제가 해결돼 카사바 가공식품인 가리를 더 수확할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연구를 시작한지 5년만이었다.
“연구는 성공했지만, 더 중요한 건 농민들에게 개량 카사바를 보급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정부만 믿고 기다릴 수 없어 직접 트럭에 카사바를 싣고 구석구석을 다니며 나눠줬죠.”
미국에서 ‘조니 애플씨드’로 불린 목사가 차에 사과나무 싣고 다니면서 전도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입소문이 나자 현지인들의 마음을 사야했던 석유회사 BP와 셸이 한 박사에게 교배종을 받아 대대적인 보급에 나섰다.
가나, 카메룬 등 기근에 시달리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도 개량 카사바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 각국의 훈련생들을 불러모았다.
카사바 개량에 성공한 후에도 내전으로 총성이 울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종횡무진하며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
그의 이런 열정에 감동한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주민들은 그를 추장으로 추대하며 ‘세리키 아그베(농민의 왕)’이라는 칭호를 선물했다. 1982년에는 기네스로부터 과학공로상을 받고, 영국 생물학술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펠로우상도 수상했다. 국내에도 그의 이야기가 초등학교 교과서 뿐 아니라 그림책 ‘까만 나라 노란 추장’을 통해 소개됐다. 지난해 4월에는 농촌진흥청 농업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제가 나이지리아를 살렸다고 하는데 카사바 덕분에 제가 얻은 것이 더 많습니다. 다만, 아프리카 후학 양성을 위해 만든 ‘한상기상’ 1, 2회 수상자들이 모두 내란과 폭동으로 희생되고, 재정문제로 지원이 중단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여생은 아내를 위해 보내기로 했는데 아내에게 치매가 왔다.
“오지에서 20년 넘게 내 뒷바라지 하느라 병이 든 것 같아 미안했어요. 아프리카에서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혼자 두려움에 떨며 지낸 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아내를 차마 미국 요양원에 보낼 수 없어 40여년만에 귀국하게 됐죠.”
지난 2020년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사는 그를 중학교 이후로 떨어져 살았던 첫째 딸이 매일 찾아와 식사를 챙기고 있다. 그는 더이상 연구는 하지 못하지만 매일 페이스북으로 친구, 후배, 제자들과 소통하고, 저술 작업도 계속 하고 있다. 다음 책 역시 아프리카에 관한 내용이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유가 있으니 어려운 나라들에게 도움을 많이 줬으면 하는게 내 유일한 바람입니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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