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기 박사 “다시 돌아가도 아프리카 선택… 기근 해결 도울 것” [차 한잔 나누며]

김수미 2023. 7. 1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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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작물보다…’ 낸 한상기 박사
서울대 교수·英 연구 기회 포기
나이지리아 行… 구근작물 연구
잦은 내란 속 유서 써놓고 출장
내병성 강한 카사바 개량 성공
阿 후학 양성… 추장 추대되기도
“연구 못하지만 페북으로 소통”

“다시 돌아가도 저는 아프리카를 선택할 겁니다.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아프리카 기근 해결에 이바지해 한국인 최초로 아프리카 추장으로 추대됐던 한상기(91) 박사는 지난 11일 경기도 수원 자택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71년 서울대 교수직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 기회를 포기하고 나이지리아로 날아가 23년간 카사바와 얌 등 아프리카 구근작물을 연구했다. 올해로 망백(望百·백세를 바라본다)을 맞은 그는 얼마전 자서전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지식의 날개)를 펴냈다. 
한상기 박사가 1976년 나이지리아 국영지 ‘데일리 타임스’ 1면에 실렸던 개량 카사바 연구 성공 기사를 찾아 들어보이고 있다. 남정탁 기자
그는 인터뷰 날짜를 헷갈리고 보청기를 해야 기자의 질문을 이해했지만, 40여년 전 아프리카에서의 추억을 꺼낼 때는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려서부터 가뭄으로 농사를 망쳐 고통받는 농민들을 보고 자라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보다 더한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를 돕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죠.”

한 박사는 중학교 2학년인 첫째 딸은 진학 문제로 제자 부부에게 맡기고 아내와 6, 10, 12세 삼남매를 데리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선택한 국제열대농학연구소(ITA)는 전세계 세번째로 생긴 농학연구소로, 미국 포드 사와 록펠러재단으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아 나이지리아 최대 도시 이바단에 설립됐다. 그의 임무는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카사바와 얌(마), 고구마 품종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내전으로 3년간 100만명 이상 사망하고, 주식인 카사바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때문에 생산량이 절반이상 줄어 아사자가 속출했다. 카사바는 세계 8대 작물 중 하나로 8억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주식으로 삼고 있는 열대성 뿌리작물이다. 
한상기 박사가 나이지리아에서 23년을 살며 출장을 다닌 거리는 지구 20바퀴를 돈 것과 같다고 한다. 그 덕에 여권만 8개다. 남정탁 기자
“카사바와 얌의 재래종 100여개를 수집해서 심어봤는데 폭삭 죽어버렸어요. 내병성(耐病性) 소스를 찾아야 했습니다.”

잦은 내란과 치안 불안 속에서 빈번하게 출장을 가야했고, 떠날 때마다 유서를 써놓고 갔다. 다행히 카사바 원산지인 브라질에서 야생 종자들을 가져와 내병성이 강한 종자를 찾았다. 브라질 야생종 컴피넌스와 나이지리아 재래종을 교배하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강한 교배종을 걸러내는 작업을 했다. 교배에 성공한 1976년 나이지리아 국영지 ‘데일리 타임즈’ 1면에는 ‘More Gary For You’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에 실렸다. 한 박사의 연구로 바이러스 문제가 해결돼 카사바 가공식품인 가리를 더 수확할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연구를 시작한지 5년만이었다.  

“연구는 성공했지만, 더 중요한 건 농민들에게 개량 카사바를 보급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정부만 믿고 기다릴 수 없어 직접 트럭에 카사바를 싣고 구석구석을 다니며 나눠줬죠.”

미국에서 ‘조니 애플씨드’로 불린 목사가 차에 사과나무 싣고 다니면서 전도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입소문이 나자 현지인들의 마음을 사야했던 석유회사 BP와 셸이 한 박사에게 교배종을 받아 대대적인 보급에 나섰다. 

가나, 카메룬 등 기근에 시달리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도 개량 카사바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 각국의 훈련생들을 불러모았다.

“내가 평생 아프리카에 살 수 없으니 누군가 내가 하던 연구를 이어가고, 나이지리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에 보급해야 하니 사람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아프리카 추장으로 추대됐던 한상기 박사가 지난 11일 경기도 수원 자택에서 추장복을 입고 있다. 남정탁 기자
그가 농업기술을 가르친 단기 훈련생이 700명, 그의 지도 하에 석·박사 학위를 딴 농학도가 50명이다. 그는 8개의 낡은 여권과 함께 제자들의 학생카드를 보관하고 있다. 

카사바 개량에 성공한 후에도 내전으로 총성이 울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종횡무진하며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 

그의 이런 열정에 감동한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주민들은 그를 추장으로 추대하며 ‘세리키 아그베(농민의 왕)’이라는 칭호를 선물했다. 1982년에는 기네스로부터 과학공로상을 받고, 영국 생물학술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펠로우상도 수상했다. 국내에도 그의 이야기가 초등학교 교과서 뿐 아니라 그림책 ‘까만 나라 노란 추장’을 통해 소개됐다. 지난해 4월에는 농촌진흥청 농업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제가 나이지리아를 살렸다고 하는데 카사바 덕분에 제가 얻은 것이 더 많습니다. 다만, 아프리카 후학 양성을 위해 만든 ‘한상기상’ 1, 2회 수상자들이 모두 내란과 폭동으로 희생되고, 재정문제로 지원이 중단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그는 한 번도 포기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지만, 치안이 불안하고 풍토병이 많은 나이지리아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말라리아 약을 매일 먹다시피 했지만, 가족이 모두 말라리아에 걸렸고 심한 종기가 생겨 아이 둘은 미국과 영국까지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프리카 기근 해결에 헌신한 한상기 박사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 ‘까만 나라 노란 추장’. 웅진주니어 제공
“아이들을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보냈는데 혼자 남은 아내가 너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은퇴하면서 아이들 곁으로 가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대로 미국으로 갔죠. 그 때가 나한텐 암흑기였어요. 더이 연구를 못하니까.”

여생은 아내를 위해 보내기로 했는데 아내에게 치매가 왔다. 

“오지에서 20년 넘게 내 뒷바라지 하느라 병이 든 것 같아 미안했어요. 아프리카에서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혼자 두려움에 떨며 지낸 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아내를 차마 미국 요양원에 보낼 수 없어 40여년만에 귀국하게 됐죠.”

지난 2020년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사는 그를 중학교 이후로 떨어져 살았던 첫째 딸이 매일 찾아와 식사를 챙기고 있다. 그는 더이상 연구는 하지 못하지만 매일 페이스북으로 친구, 후배, 제자들과 소통하고, 저술 작업도 계속 하고 있다. 다음 책 역시 아프리카에 관한 내용이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유가 있으니 어려운 나라들에게 도움을 많이 줬으면 하는게 내 유일한 바람입니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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