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살아만 있어라” 진흙더미 헤치며 실종자 수색 안간힘
‘눈물바다’ 된 피해 마을
예천 주민 “순식간에 옆집들 눈앞서 사라져” 당시 상황 전해
“귀농 1년 만에 이런 일이…우리 친구 찾아달라” 울먹이기도
“천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제발 살아만 있어줘라. 기적이란 게 또 있으니까….”
16일 오전 9시쯤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 실종자 수색 현장에서 만난 주민 장봉덕씨(56)가 삽에 묻은 진흙더미를 털어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 마을 주민인 그는 전날부터 밤을 꼬박 새웠다. 이웃 2명이 아직도 진흙더미 아래에 묻혀 있어서다. 장씨는 “(산사태로 다친) 형님이 형수님 좀 꼭 찾아달라는 말을 남기시곤 병원으로 가셨다”며 “형님 부탁을 못난 동생이 못 들어줬다”고 자책했다. 장씨의 형수는 지난 15일 진흙더미에서 구조됐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
14가구가 사는 이 마을에서 산사태가 난 시간은 지난 15일 오전 5시16분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토사는 집 5채를 흔적도 없이 쓸고 지나갔다. 주민 김영훈씨(76)는 “깜짝 놀라 나와보니 집 마당에 있던 농기계가 모두 쓸려나갔다”며 “순식간에 옆집들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사방이 흙더미라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수색 현장은 산에서 휩쓸려 내려온 바윗덩어리와 나무, 진흙들로 뒤엉켜 원래 어떤 장소였는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세탁기와 냉장고 등 대형 가전제품들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있었고 자동차는 뒤집혀 흙더미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무릎까지 들어가는 진창으로 변해버린 이곳에서 소방과 경찰대원들은 곳곳을 철제 탐지봉으로 찔러가며 실종자를 애타게 찾았다. 백석리에서는 산사태로 3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된 상태다.
지난 15일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마을회관에서는 실종자 윤모씨(62)의 언니와 남편을 비롯한 가족 10여명이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이들을 지켜보던 소방대원과 주민들도 눈물을 몰래 훔쳐냈다. 윤씨는 산에서 쏟아져 내린 물살에 휩쓸려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윤씨는 지난해 3월 이곳으로 귀농했다고 한다. 경기 수원시에 살 당시 유독 마음이 잘 맞았던 삼총사 중 두 명이 예천으로 귀농하면서다. 다 같이 모여 농사짓고 재밌게 살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윤씨는 귀농을 결심했다. 이날 만난 윤씨의 친구 송덕자씨(64)는 “귀농해서 사니까 그렇게 좋다고 자랑했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나 때문에 이런 큰일을 당한 것 같다”며 “제발 우리 친구 좀 찾아달라”면서 울먹였다.
영주시 영주동 영주초등학교에 마련된 임시대피소에서는 영주1동 주민 10여명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날 오전 9시30분쯤 주민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서로 상황을 공유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주민 손연화씨(74)는 “전날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집 앞 둑이 터졌다. 앞으로 비가 더 오면 집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산사태로 2명이 목숨을 잃은 영주 풍기읍의 안타까운 사고 소식도 전해졌다. 풍기읍에 거주하는 최경희씨(82)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비명이 들렸다”며 “밖으로 나가보니 큰아들이 머리만 내놓은 상태로 흙더미에 깔려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놀란 최씨와 가족들이 맨손으로 흙더미를 파내 큰아들을 구하자 곧이어 옆집에 엄청난 양의 토사가 쏟아졌다고 했다. 최씨는 “그곳에 살던 일가족 2명이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들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번 집중호우로 이날 오후 5시 기준 경북에서는 예천·영주·봉화·문경 지역에서 19명이 숨지고 8명이 실종됐다.
김현수·김세훈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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