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라노] 유기인가 보호인가?… 수면 위로 떠오른 ‘베이비박스’ 논란
아이 살릴 수 있는 시설 주장하기도
아이 유기를 부추긴다고 주장하기도
미혼부모 지원할 수 있는 체계 절실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라노는 지난 주 와이라노에서 ‘유령아동’에 관해 여러분께 알려드린 바 있어요. 기억하세요. 이번 주 와이라노는 유령아동 문제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바로 ‘베이비박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베이비박스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있어왔던 시설인데, 유령아동과 함께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사회 문제입니다.
지난달 21일 수원 장안구의 한 아파트 냉장고에서 4~5년 전 친모에게 살해된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됐습니다. 이 범행은 출생 미신고 사례 조사 중 드러났죠. 이에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2일부터 2015~2022년생 아동 중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유령아동 파악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2236명에 달하는 유령아동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정부의 유령아동 전수조사 이후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아동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출생 미신고 아동 2000여 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이들로 밝혀졌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베이비박스를 거쳐간 아이들 중 일부가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2009년 12월 국내에 베이비박스가 처음 생긴 이래 이어져 온 논쟁에 다시금 불이 붙는 원인이 됐습니다.
베이비박스는 사정이 있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보호자가 아이를 맡길 수 있도록 마련한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간 종교단체가 운영하고, 아이를 보호하다 보육원 등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죠. 베이비박스는 처음 생겨난 이래로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곳이다”와 “영아 유기를 조장하는 시설이다”로 의견이 나뉘며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베이비박스는 불법?
베이비박스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은 아닙니다. 법원은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온 행위도 ‘영아유기’라고 판단하고 있죠. 실제로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온 부모를 처벌하기도 합니다. 법원이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온 부모를 처벌한 판례도 존재합니다.
다만 법원은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온 행위에 대해 영아유기로 판단함과 동시에 아이를 보호하려 했다는 점도 참작합니다. 법원이 베이비박스를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쓰레기통이나 화장실 등과 같은 곳보다는 베이비박스가 아이를 보호하기에 좋은 공간이라고 판단하는 것. 베이비박스에 유기했을 때와 베이비박스가 아닌 곳에 유기했을 때의 처벌 수위가 달라지죠. 송혜미 변호사는 “베이비박스를 불법시설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며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한 것을 양형 요인으로 삼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베이비박스는 아이 살릴 수 있다”
베이비박스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베이비박스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시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이와 함께 궁지에 내몰린 미혼부모가 법적 처벌과 아이의 안위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바로 베이비박스라는 것. 사회적 편견과 열악한 양육환경, 어려운 경제사정에 시달리는 미혼부모에게는 베이비박스가 차선책이 될 수 있습니다. 법원에서도 판단했다시피 베이비박스는 아이를 유기하는 곳 중 그나마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베이비박스마저 사라지면 아이는 쓰레기통이나 화장실에 유기되거나, 최악의 경우 영아살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죠. 숨어서 아이를 낳고 살해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어느 곳에라도 맡기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부산 행복드림상담센터 이희숙 소장은 “위기 출산에 대한 조치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베이비박스가 운영되는 것이 맞다”고 말했습니다. 임신중단도, 입양도 쉽지 않은 환경에서 베이비박스마저도 없어지게 되면 미혼모들이 궁지에 내몰릴 것이라고 우려했죠. 아이를 낳아야 하지만 병원에 가지 않거나, 아이를 아무 곳에나 유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소장은 “아무런 대처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베이비박스를 없앨 수는 없다”며 “국가에서 공적으로 운영하는 미혼모를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베이비박스는 아이 유기 조장한다”
베이비박스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베이비박스가 아동 유기를 부추긴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베이비박스가 생긴 이후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한 사례가 대폭 늘었죠. ‘출생신고 없이 아이를 보낼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퍼지자 여러 가지의 이유로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거나, 출산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부모들이 손쉽게 유기할 수 있는 장소로 변질됐다는 것입니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하면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점 때문에 베이비박스를 찾는 미혼부모가 늘었죠.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동은 자신의 출생 정보나 부모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이비박스를 이용한 미혼부모 중에서는 아이에게 남기는 쪽지를 통해 아이의 신상정보를 남기기도 하지만 부모에 대한 정보는 남기지 않습니다.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알 길이 없어집니다. 이는 아이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죠. 나아가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혼란스러움을 주기도 합니다.
숭실대 노혜련(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아이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며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이들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봐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이들 중 소수는 원가족으로 돌아가거나, 입양 보내집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아동보호시설에 입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죠. 베이비박스 아이들을 전수조사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노 교수는 “베이비박스는 자신에 대한 기록도, 부모에 대한 정보도 모른 채 세상에 홀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늘린다”고 말했습니다.
▮미혼부모에 대한 지원체계 마련 절실
라노는 미혼부모에게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아이에게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베이비박스에 대한 찬반 의견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홀로 키우기 버거운 미혼부모에게 초점을 맞추면 베이비박스에 찬성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고, 아무런 기록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아이를 생각하면 베이비박스에 반대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베이비박스는 이미 아이가 태어났다는 ‘결과’에 대한 대처 중 하나입니다. 아이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결과에 대해서만 논쟁하게 될 것입니다. 베이비박스에 대한 찬반 입장에 관계없이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미혼부모를 지원할 수 있는 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아유기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부모와 아이가 기댈 수 있는 사회적인 지원 체계가 거의 마련돼있지 않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구조하고 지원해야 하지만 제도는 미비하죠. 전문가들은 사전에 위기가족을 발굴해 임신 초기부터 계속 지원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가리지 않고 어려움이 있는 가정을 모두 대상으로 해 지원할 수 있는 그런 지원 체계 말입니다.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공식 절차와 충분한 상담을 통해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하거나 입양을 보내는 기관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했죠. 사각지대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 노 교수는 “위기가족은 대부분 고립돼있어 정보도 없고, 도움을 요청하러 시설까지 찾아가기 힘든 경우도 많다”며 “지자체가 직접 위기가족을 발굴해 지원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이 소장도 “위기 출산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며 “국가에서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