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옆얼굴

한겨레 2023. 7. 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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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여행자인 나는 여행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법이 없다.

옆얼굴이라는 게, 그냥 스치듯 지나가면 별거 없지만 마음을 담아 오랫동안 보다 보면 많은 걸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니까.

요즘은 운 좋게 일상에서 내가 자란 도시의 옆얼굴을 부지런히 발견하고 있다.

어느 날엔 사람의 옆얼굴이 이토록이나 무방비한 건, 우리가 말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눈을 마주하고도 함부로 숨길 수 있는 마음들을 누군가 알아챌 수 있게 하기 위함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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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게으른 여행자인 나는 여행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법이 없다. 유명 관광지와 최대한 떨어진 숙소에 머물며 사부작사부작 동네 구경을 하는 게 보통이다. 조그만 카페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낮술을 홀짝이기 좋은 술집에 늘어져 있거나 푸릇푸릇한 공원을 찾아 걷는다. 낯선 풍경 속에 줄곧 거기 있었던 사람인 양 머물러 있는 걸 좋아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어떤 도시가 문득 드러내는 옆얼굴을 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풍경 너머에 숨어있는 어떤 표정들. 옆얼굴이라는 게, 그냥 스치듯 지나가면 별거 없지만 마음을 담아 오랫동안 보다 보면 많은 걸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니까. 카메라에 담긴 무수히 많은 타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걸 알게 됐다. 가끔은 누군가의 옆얼굴이 어떤 인터뷰보다 더 많은 말을 하기도 한다. 사뭇 쓸쓸하거나 그리워하거나 참아왔던 감정이 그만 묻어나오고야 마는. 편집실에 혼자 앉아 커다란 모니터에 비친 누군가의 옆얼굴을 볼 때, 사람의 옆얼굴은 어째서 이다지도 무방비할까 생각했다.

요즘은 운 좋게 일상에서 내가 자란 도시의 옆얼굴을 부지런히 발견하고 있다. 부산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회사가 구도심인 동구 범일동으로 사옥을 옮기게 되면서부터다.

광안리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민락동에선 요즘 같은 여름이면 커다란 캐리어를 끈 관광객들로 회사 앞이 번잡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오늘을 견디게 해 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으면,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익숙한 풍경들을 찍고 있었다. 요즘엔 내가 꼭 그런 눈을 하고 범일동 곳곳을 돌아다닌다.

최근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커피차’. 동료 작가님이 ‘투투투’, 커피 가루 두 스푼에 프림 두 스푼, 설탕 두 스푼의 비율로 직접 탄 커피를 찾아보자고 해서 따라나선 게 시작이었다. 범일동 근처엔 시장이 많아서, 커피를 비롯해 각종 마실 거리를 파는 작은 수레가 많다. 시행착오 끝에 찾은 최고의 커피차에서 말수 적고 손 빠른 사장님이 타 주시는 커피는 단돈 천오백 원. 트럭 앞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얼음이 동동 뜬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이게 사는 맛이지 싶다.

그런가 하면 이 동네엔 1인분에 육천 원짜리 백반을 파는 가게가 아주 낡은 상가에 숨어있기도 하고, ‘최신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오래된 트럭이 매일 한 자리를 지키고 서 있기도 하다. 양장 수선 전문인 컴퓨터 세탁소도, 오래된 레코드판을 사고파는 가게도 있다. 밤이면 희뿌연 비닐을 쓴 포장마차들이 하나둘씩 문을 연다. 부산 어묵 국물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부딪치다 보면 밤이 새는 줄 모를 것 같다. 그 무엇도 최신이 아니지만 최선의 멋을 가진 풍경들이 곳곳에 넘실거리고, 나는 있는 줄도 몰랐던 도시의 옆얼굴을 부지런히 마음에 담기 바쁘다.

어느 날엔 사람의 옆얼굴이 이토록이나 무방비한 건, 우리가 말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눈을 마주하고도 함부로 숨길 수 있는 마음들을 누군가 알아챌 수 있게 하기 위함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쓸쓸하게 버려지고 잊히는 마음들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날엔 타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 직업의 전부 같았다.

매일 같이 내가 사는 도시의 옆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나는 몰랐던 낯선 얼굴에 묻어나는 것들을 틀림없이 기록하자고 다짐해본다. 작고 낡고 귀한 것들로 가득한 거리, 문이 굳게 닫혀버린 가게들, 진한 부산 사투리를 주고받는 어르신들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자고. 자꾸만 납작해지는 도시 풍경 너머로 이곳이 문득 드러내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내 일이니까. 무엇도 쉽게 묻히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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