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공원은 인기가 없다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3. 7. 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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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

5·16광장 자리에 들어선 여의도공원. 여의도를 동서로 단절하는 구조적 문제, 접근성과 일상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여의도공원은 인기가 없다. 여의도에서 한강공원이나 샛강생태공원은 항상 북적이지만 여의도공원은 늘 한산하다. 주변 직장인들의 점심 산책 코스 정도로 쓰일 뿐, 다른 시간대와 주말에는 텅텅 빈다. 23만㎡ 면적에 뉴욕 센트럴 파크를 연상시키는 형태와 도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노잼’ 공원 취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원 설계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주도 계획도시인 여의도의 개발사와 도시 구조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여의도 일대는 한강 물이 불어나면 수면 아래 잠기는 광활한 모래톱이었다. 주변의 밤섬까지 연결된 모래톱이 200만 평에 달했는데, 밤섬은 뽕나무밭으로, 여의도는 목축장으로 주로 쓰였다. 1916년 일제가 비행장과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여의도에 처음 근대적 도시 기능이 탑재된다. 여의도 비행장은 일본과 만주, 중국, 유럽을 연결하는 항공기의 기착지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미군이 이어받았고, 1971년까지 대한민국 공군의 최전방 기지로 쓰였다.

60년대 말, 인구 포화 상태에 이른 서울이 한강과 강남 일대로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여의도 개발이 본격화된다. 여의도 제방을 쌓는 골재를 마련하기 위해 1968년 2월 밤섬을 폭파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돌격전을 펼쳐 같은 해 5월 여의도를 둘러싸는 7.5㎞의 윤중제를 완공해냈다. 건축가 김수근이 주도해 입체 도시 개념을 담은 마스터플랜을 작성했지만, 서울시의 재정이 빈약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계획에 없던 대형 광장이 여의도 중앙에 들어선다. 당시 서울시 담당자였던 손정목의 기록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에 따르면, 대통령이 빨간 색연필로 도면 위에 광장의 위치와 크기, 형태를 직접 잡았다. 1971년 국군의 날 직전에 완공된 광장은 여의도를 동서로 갈라놓았다. 길이 1350m, 너비 280~315m, 5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순수 아스팔트 광장은 ‘5·16광장’으로 불리며 군사 퍼레이드, 관제 집회, 반공 궐기대회의 장으로 사용됐다. 대규모 종교 행사에도 종종 쓰였는데, 1973년 빌리 그래함 목사의 부흥회,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한국 천주교 200주년 대회 때는 100만 군중이 운집했다.

5·16광장은 1970~80년대 군사 퍼레이드, 관제 집회, 종교 행사에 주로 쓰였다. 100만명이 운집한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대회 장면. 서울역사아카이브

80년대 후반부터 국가 광장에서 시민 광장으로 성격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5·16광장에서 여의도광장으로 명칭이 바뀐 이곳은 1987년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유세장으로 쓰였다. 90년대 초에는 시민사회의 집회와 시위가 연일 개최되며 오늘날의 광화문광장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무렵의 여의도광장은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즐기는 인파로 가득한 서울의 대표 여가 공간으로 우리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하다.

1995년 지방자치제의 부활과 함께 광장의 시대가 저문다. 민선 1기 조순 서울시장은 ‘21세기 환경도시 건설’을 목표로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을 세웠고, 최소 재원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전략 사업으로 여의도광장 공원화를 추진했다. 군사 정권과 전체주의의 상징인 광장을 시민의 공원으로 전환하는 계획은 지지를 받았지만, 광장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하면서 시민 문화를 수용하는 다용도 공간으로 고치는 게 낫다는 반론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초의 여의도광장.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즐기는 서울의 대표 여가 공간이었다. 국가기록원

그럼에도 광장의 공원화는 급물살을 탔고, 1996년 말 여의도공원 설계공모가 급하게 진행됐다. 녹색 정치의 서막을 연 이 공모전의 당선작은 제출작 중 가장 보수적이고 일면 진부한 설계안이었다. 그마저도 자연과 전통을 표피적으로 조합한 안으로 수정된 뒤 속전속결 공사를 거쳐 1999년 1월 여의도공원의 문이 열렸다. 광장의 자리에 들어선 공원은 20년 세월을 겪으며 광장의 사건과 기억을 완전히 지워냈다. 아쉽게도 시민들은 이 무심한 녹색 공원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공원이 여의도를 동서로 단절하는 구조적 문제, 접근성과 일상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최근 서울시는 “도시 경쟁력 향상을 위해 창의·혁신적 디자인의 수변 랜드마크를 건립한다”는 목표로 여의도공원에 ‘제2세종문화회관’을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레이트 한강’ 사업의 선도 아이템이고, 모델은 함부르크 수변의 엘프필하모니 콘서트홀이다. 비싼 랜드마크로 도시 발전을 이끄는 구상, 좀 20세기적이지 않은가. 모래섬, 비행장, 도시개발, 광장 정치, 녹색 공원이 포개진 혼종의 공간 여의도(공원)에 지금 필요한 건 다음 50년을 위한 장기적 재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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