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보고서 채택 앞두고···권영준 대법관 후보자 사퇴 촉구 이어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할 때 김앤장 법률사무소 등 대형 로펌에 법률 의견서를 작성해주고 억대 보수를 받은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의 사퇴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권 후보자는 “독립성을 생명으로 여기고 학술적 소신에 따라 학자적 의견을 개진해왔다”고 해명했지만 현행법 위반과 이해충돌 우려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권 후보자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김앤장 등 대형 로펌에 63건의 법률 의견서를 써주고 18억원(필요경비 공제 후 6억9699만원) 가량의 수입을 올렸다. 그 중 법무법인 율촌 의뢰로 작성한 의견서 1건에서 권 후보자는 피고 측 패소로 판단한 1심 판결이 잘못됐다는 취지를 35쪽에 걸쳐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나머지 의견서 62건은 어떤 사건과 관련됐는지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문제 없다” 해명에도…변호사법·국가공무원법 위반?
권 후보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국립대 교수가 소송 일방 당사자에게 유리한 의견서를 써주고 거액의 돈을 받은 행위는 국가공무원법과 변호사법 등 현행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이 준용하는 국가공무원법은 ‘공무 외 영리목적의 업무’를 금지하고 있다. 서울대법은 교수는 예외적으로 총장 허가를 받아 사기업체의 사외이사를 겸직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법률의견서 작성은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법조계 해석이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교수가 계속적으로 재산상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업무를 해왔다면 국가공무원법이 말하는 영리 목적 업무에 해당한다”며 “매년 평균 10건 이상 의견서를 5년간 작성해온 권 후보자의 행위가 (국가공무원법이 금지하는) 영리목적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고 했다.
특정인을 대리하는 로펌 의뢰로 의견서를 작성해준 일은 사실상 로펌과 공동대리하는 것과 같은 외관을 띤다는 점에서 변호사법 위반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권 후보자의 해명처럼 학문적 소신과 객관적 이론을 제시하는 모양새를 갖췄더라도, 본질적인 목적은 로펌이 수임한 사건의 의뢰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학문연구 차원으로 이뤄지는 연구용역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변호사법은 변호사가 아닌 자가 이익을 받고 제3자에게 감정·대리법률상담 또는 법률관계 문서 작성, 그 밖의 법률 사무를 취급·알선할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변호사 자격이 있어도 변호사법상 법률 사무를 하기 위해선 대한변호사협회에 회원으로 등록하고, 소속 지방변호사회에 개업 신고를 해야 한다. 법조계 일각에선 변호사 자격은 있지만 개업하지 않은 비변호사인 권 후보자의 문제에 대해 대한변협이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사실상 반쪽짜리 대법관, 후관예우 우려”…나머지 의견서 검증 요구 이어져
이해충돌 우려는 권 후보자의 대법관 적격성 논의에서 또 다른 문제 중 하나로 꼽힌다. 권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의견서를 의뢰한 로펌과 관련된 사건들을 전부 회피 신청하겠다고 밝혔으나 김앤장·세종·태평양 등 2년 내 의견서를 써준 대형 로펌의 모든 사건을 회피한다면 대법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6일 통화에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이제까지 필드에서 선수로 뛰던 사람이 심판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며 “이런 불공정성을 이유로의견서를 의뢰한 로펌과 관련된 사건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보자가 임명된다면 사실상 반쪽짜리 대법관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예컨대 권 후보자가 대법관으로 임명된 후 의견서를 써준 로펌이 대리인이 된 사건을 권 후보자가 맡으면 곧바로 공정성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권 후보자를 임명할 경우 대법원 재판 자체에 대한 불신이 가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권 후보자에 대한 의혹을 완벽히 해소하지 못한 채 대법관으로 임명하면 잘못된 관행이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로펌이 이른바 ‘후관예우’를 염두에 두는 현상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페이스북에 쓴 ‘권영준 대법관 후보자 사퇴 촉구의 글’이란 게시물에서 “대형로펌은 노골적으로 향후 대법관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는 교원을 상대로 각종 의견서 작성을 의뢰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며 “이런 현상은 정부가 타파를 주장하고 있는 전형적인 이권 카르텔 형태”라고 했다.
법원 내부에서도 권 후보자의 임명 제청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송승용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14일 법원 내부망에 올린 글에서 “후보자의 의견서 작성 행위가 영리업무인지, 변호사법 위반인지 불문하고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대 법률자본인 대형 로펌의 이해에 부합했던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며 “대법관 역할과 중요성을 감안하면 후보자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적인 영역을 제외한 부분이 공개적 장소에서 사실상 무제한적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언론을 통해 공개된 1건의 의견서는 소송대리인의 준비서면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서 “권 후보자는 학문적 소신에 따라 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검증의 대상이 되는 자료조차 제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참여연대도 논평을 내어 “공정한 재판을 위한 대법관 후보자 검증은 개인·기업 간 계약 혹은 사익을 넘어서는 중대한 공공의 사안인데도, 권 후보자가 작성했던 나머지 62건의 법률의견서 내용과 해당 사건 담당 재판부 등이 공개되지 않아 이해충돌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면서 “권 후보자는 남은 법률의견서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검증을 받을지 자진 사퇴할지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법관 후보자 임명동의안 심사경과보고서 채택 논의를 위한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전체회의는 당초 지난 13일 예정됐으나 권 후보자에 대한 추가 검증 필요성이 거론돼 오는 17일로 연기됐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3235868?sid=102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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