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편과 개악 사이 ‘누더기 수능’··· 킬러의 ‘덫’에[수능 30년]

남지원·김나연 기자 2023. 7. 1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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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계 직면한 ‘줄 세우기 도구’
‘암기 위주’ 학력고사 대안으로 등장
30년간 수정 거듭하다 되레 ‘기형화’
학습 부담 완화책으로 난도 낮아지자
2010년경부터 고난도 ‘킬러문항’ 등장
변별력 미명 아래 사교육 시장만 커져
“줄 세우기식 지필평가 유지하는 수능
상위권 학생 위해 나머지 들러리 세워”
1994학년도 2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1993년 11월16일 서울경기상고의 한 교실에서 언어영역 듣기평가 도중 한 수험생이 기도하는 모습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2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17일 서울 중구 통일로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 마련된 고사실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93년 8월20일 처음으로 실시됐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다음 달이면 꼭 서른 살을 맞는다. 수능은 교과 지식을 잘 외우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학력고사를 대신해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시행 초기만 해도 암기 위주 교육을 혁신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방식으로 주목받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수능은 고등학교 교실을 파행으로 몰아넣는 주범이 됐다. 학교와 교육과정이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오는 동안 수능은 ‘오지선다형’과 ‘상대평가식 줄 세우기’ 틀을 유지하고 있다. 공정한 선발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수능 위주 전형이 사교육 접근성이 좋은 학생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통계로 입증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적한 공교육 교과과정 외 ‘킬러 문항’은 징후일 뿐이고, 수능은 총체적으로 기형적 상태에 빠져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2020년대 학교와 맞지 않는 1990년대 ‘오지선다형·상대평가’ 시험

수능은 시행 30년 동안 조금씩 변화했다. 수능 시행 첫해였던 1994학년도 시험은 1993년 8월과 11월 2차례 치러졌고 1995학년도 시험부터는 연 1회로 바뀌었다. 1997학년도에는 400점 만점 체제가 도입됐고, 2005학년도부터는 7차 교육과정에 맞춰 사회·과학·직업탐구에 선택과목 제도가 도입됐다. 2014학년도부터는 언어·수리·외국어영역이었던 과목명이 국어·수학·영어로 바뀌었고, 탐구영역 과목들도 조정됐다. 2018학년도에는 영어 영역이 절대평가화됐다. ‘통합형 수능’이라고 불리는 현행 수능 체제는 2022학년도에 처음 실행됐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수능 전 영역에서 문·이과 구분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대신 국어와 수학 과목이 공통과목+선택과목 체제로 바뀌었다.

수능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과정 틀에 맞춰 변해왔지만 ‘오지선다형 객관식’, ‘상대평가’라는 시험의 기본 틀은 바뀌지 않았다. 학생들을 ‘변별’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객관식 상대평가’는 학생 선택권을 강화하고 창의·융합형 인재를 길러내는 방향으로 변화해 온 교육과정, 사교육을 억제하겠다는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충북의 한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A교사는 “학생들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싶어도 시험은 여전히 줄 세우기식 지필평가를 유지하고 있어 학생들이 선택과목을 고를 때 수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이미 학교에서는 평가방식을 시대흐름에 맞춰 논술형으로 가고 있는데 수능은 객관식이다 보니 평가 방식에 괴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에는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선택과목 시스템이 들어와 있다. 학생들이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원하는 대로 골라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수능에서도 학생들은 응시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본다. 2022학년도 수능 이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과목 경우의 수 조합은 816개(직업탐구 선택 제외)에 이른다. 각자 다른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의 점수를 일률적으로 비교해야 하는 상대평가 시스템에 따라 학생들은 ‘점수를 받는 데 유리한 과목’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본인이 어떤 과목을 선택했을 때 표준점수를 최고로 몇 점 받을 수 있을지 미리 알 수 없고, 운에 따라 점수가 갈린다”라며 “선택 불가능한 요소에 의해서 성취의 한계가 설정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학 과정의 기초를 닦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점수를 받기 어려운 경제, 물리학 등의 과목은 기피대상이 됐다. 지난해 수능 사회탐구영역 선택과목으로 경제를 택한 수험생은 4927명으로 생활과윤리(14만2541명), 사회문화(12만7189명) 등보다 훨씬 적었다. 과학탐구에서 물리학1을 선택한 학생은 6만2309명으로 지구과학1(14만6060명), 생명과학1(14만978명)보다 적었다. 2022학년도부터 제2외국어가 절대평가화되기 전에는 ‘한 줄로 찍어도 3~4등급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2외국어 과목 응시자 70% 이상이 공부하지도 않는 아랍어를 선택하는 기형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선택형 과목 체제에 상대평가체제 수능을 무리하게 끼워 맞추면서 나타난 결과다.

‘킬러 문항’은 수능 기형화 징후··· 수능위주 전형, 사교육에 가장 유리

‘킬러 문항’이라는 용어는 2000년대 후반 학원가에서 처음 유행하기 시작해 2010년대 초반부터 언론에 등장했다. 고난도 문제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학생들 대다수가 틀릴 것을 염두에 둔’ 킬러 문항이 등장한 것은 2010년 이후라는 게 중론이다.

정부는 과도한 경쟁을 해소하고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학습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교육과정과 수능 제도를 개편해 왔다. 이명박 정부는 ‘EBS 연계’를 처음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는 주요과목 중 하나이던 영어를 절대평가화했다. 탐구영역은 초기에 최대 4과목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2과목으로 줄었다. 변별이 가능한 주요과목은 국어와 수학밖에 남지 않았는데, 수학에서는 행렬 등이 교육과정에서 빠지며 시험 범위가 줄어들었다. 수능 자체의 난이도도 전반적으로 낮아졌다. 일부 ‘물수능’으로 알려진 연도를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았던 수능 만점자가 2012년 이후 매년 여러 명씩 배출됐다.

그런데도 수험생들을 줄세워야 할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으면서 출제당국이 꺼내든 고육책이 ‘최상위권 일부만 맞출 수 있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1~2개 출제하는 것이다. ‘대학 교육과정을 수학할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시험이 아니라 ‘최상위권을 변별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점이다. 현직 교사들은 “이런 문제를 수업시간에 풀어줄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시내 고등학교의 B수학교사는 “이런 문제를 풀어준다면 최상위권 극소수만을 위한 수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문제 차이로 대학의 ‘급’이 결정되는 학생들의 발길은 학원가로 쏠릴 수밖에 없다.

정부·여당이 사교육 과열을 지적하며 수능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을 배제,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국제고를 존치하기로 한 가운데 2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 수업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조태형 기자

30년이 지나면서 누더기가 된 수능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에는 2015 개정교육과정에 맞춰 수능을 전면 절대평가화하는 방안을 교육부가 검토했지만 무산됐다. 학생들의 수준을 변별해낼 필요성이 여전하고, 공정한 변별을 위해서는 수능이 가장 낫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문재인 정부는‘조국 사태’ 이후 서울시내 주요 대학의 정시 비중을 40%로 확대하기도 했다. 수능 절대평가화에서 ‘수능의 영향력 강화’로 정책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하지만 수능 위주 전형은 이미 (서울) 강남3구 등 사교육 접근성이 좋은 학생들이 상위권 대학에 입성하는 통로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2022년 전국 의대와 서울대 신입생을 분석한 결과 정시전형 합격자 중 강남 3구 출신 합격생 비율이 각각 22.7%, 22.1%를 차지했다. 전국 고교생 중 강남 3구 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3.2%에 불과한데도 수능으로 선발하는 정시모집에서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이는 평가원 공식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평가원이 2022학년도 수능 결과를 시도별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국어영역 1등급 비율은 서울 4.2%, 전국 2.6%였다. 수학의 경우 서울 학생들은 5.1%가 1등급을 받아 전체 학생 중 1등급 비율(2.4%)보다 2배 이상 높았다. 1·2등급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곳은 서울·대구·경기로 모두 사교육 접근성이 좋은 지역들이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극도의 변별력을 요구하는 소수 상위권 대학을 위해 나머지 아이들을 들러리 세우는 현재 수능 시스템을 더는 끌고 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 [수능 30년] 복잡한 표준점수, 변별의 최선일까
     https://www.khan.co.kr/national/education/article/202307161455001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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