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자 아닌 분?"…전쟁터 간 대통령, 긴박했던 순간들
#"여기 대한민국 기자 아닌 분 계십니까"
14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2시30분 폴란드 바르샤바 한 호텔에 설치된 한국 순방기자단 프레스센터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프레스센터 문이 닫혔고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빠르게 '외부자 존재'를 점검했다. 국가적 기밀을 발표하기 직전 국익을 생각하는 '우리 편'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올 것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줄곧 예상됐으나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10~12일)와 폴란드 공식방문(12~14일) 일정이 다가올수록 참모들은 부인하기 바빴다. 순방 기간 중에도 외교안보 수뇌부는 "우크라이나 방문은 애초 계획한 적도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14일 예정된 순방일정이 끝나가고 출국 시간이 다가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호텔에서 철수 직전에 브리핑이 잡혔다. 이례적으로 조태용 국가안보실장과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김은혜 홍보수석, 이도운 대변인 등 핵심 참모들이 줄줄이 프레스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박한 공기 속에 짧은 한숨이 곳곳에서 나왔다.
#"노트북을 닫아주십시오. 휴대폰 녹음도 안 됩니다"
엠바고(특정 시점까지 보도유예)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브리핑 내용을 기록할 수 없도록 보안 조치를 요구했다. 이어진 고위관계자들의 브리핑은 '죄송하다'는 사과로 시작됐다. 국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이유에서다.
"저희가 가는 나라가 전쟁 중인 나라이기 때문에 비상시의 계획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어려우시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서 이번 일은 아주 특별하게 지금부터 저희가 엠바고를 풀 때까지 철저히 엠바고를 지켜주시고 절대로 사내에서도 보안이 지켜질 수 있도록 각별히 협조를 구하는 말씀을 드린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우크라이나 전격 방문은 이처럼 특급 보안 속에 진행됐다. 순방기간도 돌연 '2박3일'이 연장됐다. 수행원과 기자단은 이미 호텔 체크아웃과 짐 부치기를 마친 상태였지만 모두 취소됐다. 국가원수가 전쟁지역을 들어가는 문제라 도청 우려 등으로 기자단의 전화,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등 통신 사용도 제한됐다. 회사와 집에는 텔레그램 메시지로 '갑자기 순방기간이 연장됐다'는 식의 우회적 표현을 간신히 전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오늘(14일) 밤, (15일) 새벽 한 2시 정도까지가 가장 위험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좀 통신 횟수를 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이번 방문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식 초청과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뤄졌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우리 군의 파병지가 아닌 전쟁 중인 나라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만큼 다양한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됐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에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를 분명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협력 의지를 다지기 위한 윤 대통령의 결단이 작용했다.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올 들어 수차례 우크라이나 측으로부터 방문 요청을 받았다.
지난 5월16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가 윤 대통령을 만난 자리, 5월21일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계기에 처음 이뤄진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공식·비공식적으로 이같은 의사가 전달됐다.
당시 젤렌스카 여사는 글로벌 국가인 한국이 그동안 보여준 지지와 연대에 사의를 표현하면서 앞으로 가능한 부분에서 지원을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 구체적으로는 지뢰탐지 제거 장비, 보급 수송차량 등 비살상 군사 장비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재건과정에서 한국의 많은 기업이 참여해주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방문 요청 친서도 전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5월 정상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그간 의약품과 발전기, 교육용 컴퓨터 등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인도적 지원 물품을 지원해줘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추가적인 비살상물품 지원을 희망한다"고 당부했다. 또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을 조속히 종식시키고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한국과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얼마 전에 저희에 대한 방문 요청이 있었고 저희가 인근국(우크라이나)에 방문을 하게 됐다"며 "나토 순방을 준비하면서 오래 전에 양자 방문에 대해서 초청을 받았고 고민을 오래 했다"고 밝혔다.
이어 "상대국 정상이 정중하게 방문 초청을 하는 것은 지금 국제사회의 초미의 과제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 대한민국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깔려있는 것이고 그것을 담은 요청이라고 저희는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초청을 받았지만 쉽사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경호와 안전 문제가 컸다. 언제 어디서 공격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전쟁 중인 나라를 국가원수가 방문하는 일은 극도로 위험성이 따른다. 앞서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등도 모두 철저한 보안 속에 비밀리에 방문했다. 이동 경로와 교통수단, 시간대 등은 당연히 특급 보안 사항이다.
대통령실은 "과거 우리 군의 파병지에 군통수권자로서 방문한 사례(노무현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는 있으며 우리 파병지가 아닌 전장에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연대 차원에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최초"라고 밝혔다.
우리 당국은 수개월의 준비와 검토를 거쳐 현지 상황과 돌발 변수 가능성까지 살펴 최종 안전 여부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경호와 안전 문제, 방문 필요성 문제를 놓고 당연히 고심 끝에 입장을 정하고 대통령께서 결심하셔서 방문하게 됐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는 항공편과 육로, 기차편 등을 모두 이용하면서 가는데 14시간, 오는데 13시간 등 왕복 27시간을 극도의 보안 속에 움직였다.
윤 대통령은 이번 방문을 통해 국제사회에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를 확고히 보여주는 한편 향후 본격화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협력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는 각오로 보인다. 이미 자유진영의 주요 선진국들인 G7(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 정상들은 모두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은 1조 달러 이상 규모로 예상돼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재건을 위한 원조사업이었던 마셜플랜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예상된다.
바르샤바(폴란드)=박종진 기자 free2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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