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외교수장,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동 美 블링컨, 英·리투아니아 방문 후 인도네시아로 美 “자유·개방적 남중국해 항행 위한 단일대오” 동남아 “대리전·분열 원치 않아, 냉전구도 회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을 매개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아세안 외교장관 회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 등 일련의 회담이 마무리됐다. 이 가운데 ARF는 이제 국내 독자들에게도 제법 알려질 정도로 중요한 외교 행사로,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역내 다자안보 협의체다. 유엔(UN)과 함께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한 모임이다. 미·중 갈등에 남북한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올해 ARF에 주목하는 시선이 많았지만, 북한의 불참으로 남북한 외교 수장이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올해 ARF에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도 참석했다. 블링컨 장관은 지난달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왕위 위원을 만났다. 두 사람의 자카르타 회동은 건강 문제로 ARF에 참석하지 못한 친강 중국 외교부장을 대신해 왕위 위원이 참석하면서 이뤄졌다.
양 측은 회동 이후 건설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지만, 미·중 갈등이 엄연한 현실에서 여러 사안에 이견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블링컨 장관은 “미·중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한 소통 채널 구축의 필요성도 역설했지만,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이견이 두드러진 부문으로는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문제였을 것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갈등과 함께, 역내 긴장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ARF는 중·아세안 관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중국과 아세안이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협상 가속화에 노력한다는 데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 美 “남중국해 자유·개방 항행에 아세안 힘 모아달라”
미·중 갈등이 이전보다 완화되는 모양새 속에 일종의 ‘줄 세우기’ 노력도 이어졌는데, 아세안 다수 회원국은 사실상 이를 거부하는 흐름이었다. 미국이 중국과 갈등·대화 국면을 이끌어가면서 아세안 회원국에게 요구하는 ‘합류’를 회원국들이 사실상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언론도 이런 점을 다뤘다.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이 남중국해와 대만 연안에서 점점 더 공격적인 행태를 취하고 있는 와중에 블링컨 장관이 아세안 회원국 외교 수장들을 만났다고 15일 전했다. 그러면서 블링컨 장관이 중국의 아·태 지역에 대한 위협에 경고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남중국해 등의 개방과 자유로운 항행 방침에 동남아 국가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날 미·아세안 외교장관회의 모두 발언에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수호하고 대만해협 전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AFP통신에 따르면 블링컨 장관은 “우리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번영하고, 안전하고, 연결되고, 탄력적인 인도태평양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링컨 장관이 언급한 인도태평양 지역은 아세안 회원국들이 평소 사용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혹은 아시아 지역과는 다른 표현이다. 블링컨 장관은 또 “(이런 비전은) 국가들이 그들 자신의 길과 파트너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지역을 의미하며, 문제점은 강요방식이 아닌 공개적인 방식으로 다뤄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 “아세안, 미국의 입장과 정렬되지 않아”
아세안 회원국 지도자들은 미국 측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미국의 요구에 사실상 거리를 두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중의 갈등 상황에서 아세안은 미국과 정렬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인도네시아의 방침이 대표적이다. 레트노 마르수디 외교장관은 인도네시아 외교부 홈페이지에 “인도태평양 지역은 전쟁터가 아니다”며 “이 지역은 안정 상태가 유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레트노 장관은 자카르타에서 열린 EAS 외교장관회의 개막식에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국가들이 참여하는 EAS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어떤 이들은 이 지역이 뜨거운 곳에서 냉전시대의 증상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미·중 갈등 상황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EAS는 아세안 10개 회원국과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8개국으로 이뤄져 있다.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교장관도 14일 기자들을 만나 유사한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우리는 특정 편을 들지 않는다”며 “우리는 대리국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속국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분열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며 “동남아가 분열돼 대리전쟁을 하는 냉전시대의 나쁜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동남아 지도자들의 이런 인식과 관련, “미국과 중국 등이 다른 경제 파트너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기 때문에 일부 선택은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며 “미·중의 디커플링과 디리스킹이 실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중간지대의 국가들은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 냉전시대 증상에…“중립이 아세안 원칙”
동남아정치 전문가인 김형종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미·중 갈등에도 아세안 회원국들이 기존 원칙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김 교수는 "아세안은 중립을 주요 원칙과 규범으로 발전시키며 강대국 간 갈등에서 대화를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촉진해왔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중립적 위치에서 대화의 장을 제공하고 강대국과의 실질적 협력을 확대하는 중심성 확보가 아세안의 규범적 전략"이라며 "아세안은 냉전시대의 회귀는 결코 원하지 않으려 이를 막기 위해 단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블링컨 장관의 인도태평양 지역 방문은 임기 2021년 임기 시작 이후 12번째였다. 인도네시아 방문은 4번째였다. 블링컨 장관의 잦은 방문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연결하려는 정렬 구도를 벗어나려는 지역을 설득하려는 행보라고 WP는 해석했다.
블링컨은 인도네시아 방문에 앞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수행해 영국, 리투아니아를 찾았다. 이어 13일 인도네시아로 이동해 왕이 위원과 1시간 30분 넘게 회동했다. 이튿날에는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아세안 회원국 외교장관, 박진 외교 장관,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 등과 연쇄 회담을 가졌다. 블링컨 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북한 문제, 미얀마 군부 통치 상황 등에 대해서도 회원국과 논의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