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도 두손 든 도쿄전력과 30년간 ‘과학’을? [아침햇발]
[아침햇발]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원자력발전소에서 폭발과 함께 연기가 치솟는데 국정 최고 책임자인 총리는 이를 텔레비전 뉴스 특보를 보고 알게 된다. 상황은 긴박했지만 1시간이 지나도 현장에서 어떤 보고도 올라오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방사능 피해 반경이 250㎞에 이르러, 수도 시민 등 5천만명을 피난시켜야 한다.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사태 앞에서 총리의 입은 타들어가지만 판단에 필요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영화 장면이 아니라 12년 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실제 벌어진 일이다. 제1원전에 바닷물이 들어찬 것은 지진해일(쓰나미)이라는 자연재해 때문이었다. 하지만 1~3호 원자로의 핵연료봉이 녹아내리고(노심용융), 들어찬 가스가 폭발(수소폭발)하는 상황에서 드러난 민간 운영사 도쿄전력의 무능과 무책임은 왜 이 사고를 ‘인재’로 불러야 하는지 말해준다.
당시 수습의 총사령관이던 간 나오토 총리는 “도쿄전력은 (책임질 일을 피하기 위해) 위험을 계속 과소평가하려 했다”고 증언한다. 지진 발생 4시간 뒤부터 노심용융이란 가장 심각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나흘 뒤에 올라온 보고서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내용은 사고 1년 뒤 독일 공영방송 <체트데에프>(ZDF)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후쿠시마의 거짓말>에 잘 정리돼 있는데, 지금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이제 밸브를 여는 일만 남았다. 바로 옆 나라의 윤석열 정부가 방류를 용인해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르면 8월부터 1066개 탱크에 담긴 133만t의 오염수를 희석해 바다로 내보낸다. 처음엔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가 감시 인력을 상주시킨다 했고, 한국도 전문가를 파견하고 싶다고 일본에 밝혔다. 그런데 매일 120t씩 장장 30~40년이다. 여론의 관심이 멀어지면 오염수 처리는 사실상 도쿄전력의 손에 맡겨진다고 봐야 한다. 약속한 처리 기준이나마 제대로 지킬까? 도쿄전력이 지금까지 보여준 거짓과 은폐의 사례는 이런 의심이 과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도쿄전력의 불투명성은 사고 이전에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에는 후쿠시마의 원자로를 설계한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사 퇴직 엔지니어 스가오카 케이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원자로 정기점검에서 스가오카를 포함한 점검관들은 이전에 모르던 큰 균열을 확인한 데 이어 습식건조기가 설계와 달리 거꾸로 설치된 것을 발견한다. 중대한 결함이었는데, “도쿄전력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느냐”는 질문에 스가오카씨는 이렇게 답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마, 닥쳐’였죠.” 점검 보고서에서 그런 내용을 빼고, 비디오에서도 균열을 찍은 부분을 지우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스가오카씨는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10년 동안 침묵하다, 퇴직 후 담당 관청에 이런 내용을 고발했다고 한다. 심각한 것은 이런 은폐의 습성이 도쿄전력의 기업 문화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정·관계, 언론계, 학계가 촘촘히 얽힌 ‘원전족’이란 이권 네트워크와 함께 작동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시간이 흘렀으니 변화가 있었을까? 간 나오토 총리는 2021년 <한국방송>(KBS)과 한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도쿄전력의 체질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최근 지진으로 다시 한번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해 2월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도 도쿄전력은 가동 중인 원전의 피해 상황을 제대로 밝히지 않아 은폐 의혹을 받았다. 오염수 처리와 관련해서도 의혹을 사는 일이 여럿 있었다.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통하더라도 탄소-14가 걸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2020년까지 감춰왔다. 1차 처리 뒤에도 오염수에서 백혈병·골수암을 일으키는 스트론튬-90이 기준치보다 최대 2만배 높게 검출된 일도 지역 언론이 폭로한 뒤에야 인정했다. 알프스가 여러차례 고장 났지만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2021년 9월 필터 25개 가운데 24개가 파손된 게 드러났는데, 그 2년 전에도 필터 25개 전부가 고장 났던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오염수를 태평양 물과 섞으면 안전하다는 게 과학이라 한다. 하지만 천일염을 사두는 국민의 불안은 경험적 근거를 갖고 있다. 누구 손에 쥐여져 있고 누구에게 이익인 과학이냐는 물음이 불안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에서도 신뢰를 못 받는 도쿄전력과 30년짜리 ‘과학’을 하게 됐다.
bhle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침수 탈출법…안전벨트 클립으로 ‘창문 모서리’ 치세요
- ‘대통령 부재’ 비판 의식했나…윤, 원격 ‘폭우 대응’ 연속지시
- “결혼 두달째 30살 조카, 급류에…지하차도 침수 예방 가능했다”
- 사람 키 2배 흙더미…산사태 예천군 실종자 수색 현장 [포토]
- 김건희, 우크라 아동 그림 전시 제안… ‘명품 쇼핑’ 논란엔 침묵
- [영상] 오송 지하차도 블랙박스엔…1분도 안 돼 급류 콸콸
- 공산성 누각, 석장리 구석기 유적 침수…문화유산 피해 31건
- 맥주·막걸리 ‘물가연동 주세’ 폐지되나…세금 핑계 폭리 차단
- 철로 붕괴 위험에 이틀째 멈춘 일반열차…KTX·SRT도 서행·지연
- 직원이 ‘호객’?…김건희 명품 쇼핑 해명에 민주 “경호 뚫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