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진실화해위 조사관의 자존심과 수치심

고경태 2023. 7. 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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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열악한 조사 환경 속 ‘부역자’ 타령에 모욕적인 제보자 색출 조사까지
지난 7월4일 오후 열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제58차 전체위원회에 앞서 김광동 위원장(오른쪽)과 이옥남 상임위원(왼쪽)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기는 포기하고 3기를 기다려야 할까?”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들 사이에서는 이런 자조 섞인 말들이 돌고 있다고 한다. 현 진실화해위는 1기(2005~2010년)가 활동한 뒤 10년의 공백 끝에 출범한 2기다. 2기는 가망이 없어 보이니 나중에 3기를 출범시켜 그때 기대를 걸어보자는 것이다. 진실화해위 내부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런 말들은 주로 한국전쟁 사건을 다루는 조사1국(조사1~4과)에서 나온다. 인권침해 사건을 다루는 2국(조사5~8과)은 상대적으로 환경이 좋다며 부러움을 보내기까지 한다. 1국 조사관들은 한국전쟁기 학살 희생자 유족들과 위원회 윗선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라는 고충을 토로하곤 한다. 유족들은 신청 사건의 조사와 진실규명 결정이 왜 이렇게 늦어지냐는 항의를 하고, 윗선에서는 “부역자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작성을 완료한 보고서들을 보류하고 있다.

■ 샌드위치 신세에 과중한 업무량

보고서를 지연시킨 윗선 책임자들은 다름 아닌 김광동 위원장과 이옥남 상임위원(1소위 위원장)이다. 이들은 유족 대표를 만날 때면 아름다운 말들만 한다. 지난 5일 김 위원장은 (사)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한국전쟁유족회, 회장 김복영) 회원 10여명을 만난 자리에서 “내년 5월26일까지 한국전쟁기 사건의 2/3를 진실 규명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무 문제 없다”는 말로 유족들을 달랬다.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은데 말이다.

진실위원회 관계자는 “진실규명 통지가 늦어지는 것은 일단 조사관들의 과중한 업무량 때문”이라고 말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서 1인당 조사관이 맡은 평균 사건 수는 200건 정도라고 한다. 2기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한국전쟁기 사건 신청은 1만3842건(군경 9957, 적대세력 3885)으로 1기 때의 9609건(군경 7922, 적대세력 1687)보다 1.5배 많다. 반면 조사 기간은 1기의 4년2개월에 비해 훨씬 짧다. 이 관계자는 “대부분의 조사관이 사건에 대한 애정과 진실규명 통지를 기다리는 신청인을 떠올리며 윗선과 타협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른 시일 안에 진실규명 보고서를 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 경찰 신원조회자료, 양날의 칼

그러나 2기 진실화해위에서 한국전쟁 사건의 진실규명에 이르는 과정은 훨씬 어려워졌다. 1기 때 조사에 응한 목격자, 가해자 등 참고인들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다. 경찰 자료에서 희생자 명단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신청인의 진술에 의존해야 한다. 신원조회를 위해 만들어진 경찰 자료는 희생 사실의 근거가 되어 진실을 밝히는 데 요긴하지만, 최근 들어선 ‘부역자 판별’의 근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커졌다. 경찰 자료가 없어도 힘들고, 경찰 자료가 있어도 힘들게 된 이 기막힌 딜레마는 김광동 위원장 취임 이후의 일이다.

한 조사관은 “김 위원장이 취임 직후부터 부역자 부역자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부역자처리지침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50건의 보고서를 두 달 이상 보류하는 일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실제 보류된 보고서의 분량은 보도된 50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한국전쟁유족회, 회장 김복영) 회원 10여명은 지난 7월5일 오후 진실화해위를 찾아 김광동 위원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내년 5월26일까지 한국전쟁기 사건의 2/3를 진실규명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무 문제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진 한국전쟁유족회 제공

조사를 둘러싼 환경도 바뀌었다. 1기 때의 진실규명 보고서는 처음 하는 조사이니만큼 사건의 전모와 실체 파악이 가장 중요했다. 2기 때의 보고서가 완성도 측면에서 1기 때보다 진전되려면 사건 가해 책임자들의 구체적인 지휘 체계까지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 ‘배·보상’이 더 중요한 화두처럼 돼버려

그런데 현재 상황은 ‘배·보상’이 더 중요한 화두처럼 돼버렸다. 김 위원장이 적대세력 희생자들의 배·보상을 강조하고 배·보상심의위 설치를 언급하면서 생겨난 일이다. 김 위원장은 배·보상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는 시늉을 하면서 지난달 8일 영락교회에서는 학살 유족들의 배·보상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조사관들도 진실규명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유족들이 이후 법원에서 직면할 배·보상 소송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진실규명 보고서 작성 시 개별 희생자가 그곳에서 희생당한 게 맞는다는 자세한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다간 진실화해위가 민원처리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1기 때는 조사관들 의사표현 거침없이 해

진실화해위는 독립된 국가 조사기관이다. 독립성은 조사관들의 자존심이다.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1기 때 조사관들은 쉼 없이 싸움을 벌였다. 위원들이 법의 취지에 어긋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결정을 했다고 판단하면 의사 표현을 거침없이 했다. 출근길에 손팻말 시위를 했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1기 막판에는 직협(직장협의회)를 구성해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2기 때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조사관들은 1기 때와 다른 인적 구성과 10년의 공백 등 여러 원인을 댄다. 상설조직이 아니라 활동 기간이 정해진 한시조직이라는 진실화해위의 한계도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 상명하복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사실 진실화해위 조사관은 기계적으로 일할 수 없는 직무다. 조사관의 역사의식, 사건에 대한 지식과 관점, 커뮤니케이션과 공감능력, 유족을 대하는 태도, 조사 능력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독립된 조사기관에서 상명하복의 문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김광동 위원장은 취임 이후 자신의 이념과 세계관을 조사관들에게 강요하는 모양새다. 진실화해위 설립의 기본 취지와 방향, 분위기를 멋대로 바꾸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초 조사보고서 보류에 관한 <한겨레> 보도가 나오자 김 위원장은 월례회의에서 제보자를 찾으라는 지시를 했고, 5명 안팎의 간부와 조사관이 제보 여부를 조사받는 모욕적인 상황을 견뎌야 했다. 내부에서는 국가인권위에 제소해야 하는 인권침해가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야당 추천 위원들이 소위나 상임위, 전체위원회에서 쓴소리를 하지만 역부족이다. 국회도, 여론도 진실화해위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유족들도 1기 때에 비하면 소극적이다.

마지막 믿을 사람은 조사의 주체, 조사관이다. 조사관들은 지금의 진실화해위 조직에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가. 자존감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실화해위 조사관의 기쁨과 슬픔, 자존심과 수치심에 관해 생각해 볼 시간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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