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 강제격리 보상’ 20년…한·일 연대는 계속된다

이지혜 2023. 7. 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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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뉴스분석][한겨레S] 뉴스분석
일본 정부 ‘소록도 보상’ 가능했던 이유
일제 때 인권침해 보상 위해
양국 변호사 한뜻…입법 결실
한센가족까지 보상 범위 넓혀
소록도 모여 진행상황 점검

1944년 임여희(가명·79)씨는 전남 고흥군 녹동 소록도에 강제격리된 한센인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유전병도 아닌 한센병의 대를 끊기 위해 조선 한센인들에게 강제 단종·중절 수술을 자행하던 때였다. 임씨 부모는 서슬 퍼런 감시의 눈을 피해 딸을 낳았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의 ‘미감아’로 불린 임씨는 해방 뒤에도 부모와 떨어져 철조망 너머 보육원에서 자랐다. 부모는 한달에 한번 만나야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임씨는 16살에 어머니를 두고 섬을 탈출했다. 혈혈단신 상경한 임씨는 ‘한센병 환자 가족’이라는 낙인을 피해 고아라고 속이며 돈을 벌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다. “소록도의 ‘소’자만 나와도 심장이 벌렁”대는 고단한 삶이었다. 나이 일흔이 넘을 때까지 “자식들도 모를 만큼” 최선을 다해 소록도를 외면해온 임씨는 회한처럼 밀려온 ‘부모 생각’에 4년 전 소록도를 찾을 용기를 냈다.

2019년, 59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임씨는 어머니 기일을 그제야 알게 됐다. 한센인과 그들의 가족이 일본 정부에 보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제 임씨는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을 청구한 한국인 한센가족 중 한명이다.

한센인권변호단, 소록도 2박3일

1916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이어진 일본의 조선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과 각종 인권침해에 대한 피해보상 운동은 어느덧 20년차에 접어들었다. 이를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은 6월29일~7월1일 전남 고흥군 소록도를 방문해 그동안의 연대활동을 돌아보고 책 공동 출간을 논의했다. 한국 변호사는 8명, 일본 변호사는 7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2박3일간 두차례 간담회를 열었고 6월30일에는 소록도 주민들을 만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한센가족 피해보상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의 인연은 도쿠다 야스유키(79) 변호사가 2004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광주·전남지부와 대한변호사협회(변협)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 변호사들은 일본 법원에서 한센인 강제격리의 근거가 된 ‘나예방법’ 위헌 확인과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성과를 거둔 참이었다. 일본 의회가 소송 결과를 존중해 2002년 ‘한센보상법’을 제정한 뒤 일본 한센인 1만명에 대한 보상도 이뤄졌다. 일본 변호사들은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에도 똑같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국과 대만에 손을 내밀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한국과 대만 등 ‘식민지’ 한센인의 보상 요구를 바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에 돌입했으나 대만 낙생원 한센인은 승소한 반면 소록도 한센인은 패소하는 엇갈린 판결이 2005년 10월25일 나왔다. 피해자 국적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판사별로 달리 판단한 ‘고무줄 판결’이었다. 한·일 변호사들은 법 개정 투쟁에 매달렸고 2006년 일본은 한센보상법을 고쳐 일제강점기 강제격리된 한국과 대만 한센인을 명시적으로 보상 대상에 포함했다. 한국 한센인 590명이 이 법에 따라 1인당 800만엔(약 1억원) 보상을 받았다.

2019년 일본에서 한센가족의 피해를 보상하는 ‘한센가족보상법’이 만들어진 뒤 한국인 한센가족들도 일본 정부의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한센인권변호단은 현재 한국인 한센가족 138명이 일본 정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중 28명은 보상이 확정됐고 임씨를 비롯한 110명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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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은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나눔연수원에 모여 그동안의 연대활동을 돌아보고 책 공동 출간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H6s한센인권변호단 제공

‘전후 보상’ 아니었기에…

지난 20년간 한센인과 한센가족 피해보상은 지난한 ‘증거 찾기 싸움’이었다. 본인 또는 가족이 일제강점기 강제격리된 사실을 증명하려면 소록도 원생명부나 사망자명부에 이름이 있거나 1945년 이전 발병 이력이 적힌 ‘나환자관리카드’ 등 서류가 필요했다.

임씨는 1960년 16살 때 소록도를 나가서야 자신의 호적은 물론 자신의 부모 모두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친척을 찾아가 통사정해 할아버지의 딸로 입적했는데, 뒤늦은 입적의 과태료를 줄이기 위해 출생연도를 1944년에서 1947년으로 바꿨다. 일본 정부는 한센가족 피해보상 청구인의 자격을 ‘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하는 탓에 그 호적이 임씨의 발목을 잡았다. 일본 한센인권변호단의 오쓰키 노리코 변호사는 “임씨 부모님은 소록도 원생명부 기록을 찾아 후생노동성에 추가 제출했다”며 “임씨의 사연을 비롯해 청구인들의 상황을 후생노동성에 자세히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한-일 사이 여러 과거사 가운데 한센인 문제는 성과를 거둔 유일한 사례다. 물론 한국 한센인에게 일본 정부가 직접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법을 개정해 보상금을 지급했다. 특히 한센보상법 전문에는 이례적으로 “회개와 반성의 뜻을 담아 깊이 사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등 다른 과거사 문제와 견줘 대조적이다.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은 한센인 피해보상이 성공적일 수 있던 이유로 하나같이 ‘두 나라의 연대’를 꼽았다. 구니무네 나오코 변호사는 “일본에서 소록도 주민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일본 한센인들이 찾아와 자리를 지켰다. ‘동지니까 당연히 와야 한다’던 일본 한센인들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양국 투쟁 주체(피해자)가 함께 싸웠다는 점이 다른 과거사 문제와 달랐던 점”이라는 게 일본 한센인권변호단의 설명이다.

일본 입장에서 한센인에 대한 피해보상은 ‘전시’에 이뤄진 국가 행위에 책임을 묻는 ‘전후 보상’이 아니라는 점도 해결에 도움이 됐다. 위안부, 강제동원, 원폭 피폭 등과 달리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은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1980년대까지 부분적으로 지속됐다. 일본은 전후 보상 문제에서 ‘국가 행위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국가무답책 법리로 일본 정부의 보상 책임을 면제해왔다. 도쿠다 변호사는 “일본 전후 보상 문제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국가무답책 법리다. 일본인 중에도 위안부 피해자가 있음에도 소를 제기하거나 보상법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이유”라며 “그 부분은 일본 변호사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소록도/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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