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려준 선물"…日 신생기업 '황당한 꿈' 현실 되나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IBM이 힘들게 개발한 최첨단 반도체 기술 日에 주는 이유
한국·대만이 양분하는 반도체 시장 "불안하다"
'펩리스' 위주 美·EU, 대안으로 일본 선택
1년새 세계 3대 반도체 기업 모두 일본 집결
日 반도체 죽인 美 '히노마루 반도체 부활' 앞장
지정학적 리스크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일
지난해 초부터 일본 전자업계에서는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생산 능력 상당 부분을 중국의 위협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본으로 옮긴다는 시나리오가 돌았다. 음모론 정도로 취급됐던 시나리오는 1년이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일본은 세계 1~3위 반도체 기업인 TSMC, 삼성전자, 인텔의 생산 공장과 연구개발(R&D) 거점을 모두 자국에 유치했다.
TSMC는 작년 6월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연구개발센터를 가동해 3차원 반도체 제조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또 구마모토현에 1조2000억엔(약 11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류더인 TSMC 회장은 지난달 6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일본의 두 번째 신공장을 구마모토현에 건설할 방침”이라고도 밝혔다.
해외진출 자체가 드물었던 TSMC가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 두 곳의 거점을 동시에 설치하는 곳은 일본이 유일하다. 삼성전자도 300억엔 이상을 투자해 요코하마시에 연구개발(R&D) 전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할 계획이다. 세계 4위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도 히로시마현 공장에서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최대 5000억엔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본에 잇따라 진출하는 상황은 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코로나19 확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패권 경쟁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일본의 신생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자칫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최첨단 반도체 양산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미중 패권 경쟁 덕분이다. 라피더스는 IBM으로부터 2nm 반도체 기반기술을, 벨기에 반도체 연구개발기관인 imec으로부터 2nm급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기술을 지원받기로 했다.
IBM과 imec은 왜 자신들이 힘들게 개발한 첨단 기술을 라피더스에 전수하는 걸까.미국과 유럽연합(EU)도 라피더스의 성공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조사회사 노메타리서치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44%에 달한다. 이 가운데 10nm 미만 첨단 반도체의 90%는 대만에서 생산된다.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도 한국과 대만이 양산을 양분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미국과 일본, EU 등 선진국들은 한국과 대만이 양분하는 반도체 시장을 우려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등 대만해협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벌어지면 미국과 일본, EU 모두 '산업의 쌀'인 반도체를 확보할 수 없을 가능성이 커진다. 인텔, IBM 같은 미국 반도체 대기업들은 개발과 설계만 하고 생산은 TSMC 등 외부에 위탁하는 '펩리스' 기업들이다.
한국과 대만 이외에 첨단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는 제조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은 선진국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대안으로 선택된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2022년 5월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협력기본원칙'에 합의했다. 두 달 뒤 열린 미일경제정책협의위원회(경제판 2+2)에서는 반도체 관련 중요 기술의 육성과 보호를 위해 두 나라가 공동으로 연구개발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IBM이 라피더스에 2nm급 첨단 반도체 기술을 전수하게 됐다.
미국은 1980년대 후반 세계 시장을 석권한 일본 반도체 업계를 고사시킨 나라다. 1986년 미일반도체협정을 체결해 일본 반도체의 수출을 규제했다. 이 협정과 엔화 가치 급등 여파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대로 한국과 대만 반도체 업계는 세계 시장을 석권할 기회를 얻게 됐다.
30여년 전 일본 반도체를 죽였던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에 앞장서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평가다. 일본 입장에서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정부도 미중 패권 경쟁을 30여년 만에 찾아온 반도체 부흥의 기회로 삼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달 7일 “선진국들이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을 이전하려는 상황에서 일본의 매력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를 경제 안보상 중요한 4대 전략 분야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고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의 지원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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