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뮤지컬 4000억 시대’에도 해외 기웃거리는 이유 [K-뮤지컬 시대]
억눌린 관람 욕구 해소…올 들어 반전
적은 인구와 부족한 극장…내수 한계
아시아 넘어 본토로…해외 진출은 생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난해 한국 뮤지컬 시장엔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코로나 엔데믹 이후 공연 수요가 폭발하면서 뮤지컬 시장 규모가 4000억원을 넘어선 것이다. 올해 역시 역대 최고 기록을 달성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훈풍에도 공연계는 마냥 웃을 수는 없다는 지적이 많다. 내수 시장의 한계, 부족한 공연장의 숫자 등을 이유로 뮤지컬계는 해외 시장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지난해 뮤지컬 티켓 판매액은 약 4250억원으로, 역대 최고 기록을 썼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지난 2020년만 해도 한국 뮤지컬 시장은 3000억원 대에서 1500억원으로 급락했지만, 2021년 이후 ‘위드 코로나’와 함께 관객도 극장으로 돌아왔다.
올 상반기에도 긍정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1~6월 국내 뮤지컬 티켓 판매액은 총 2260억288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828억5738만원)보다 23.6%나 늘었다.
하지만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게 공연계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코로나 이전보다 공연시장이 확장된 것이 아니라, 그간 억눌렸던 (공연 관람) 욕구가 폭발하며 발생한 현상”이라며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 사회적 이슈로 지방을 시작으로 공연 관람과 매출액 감소가 시작됐고, 서울도 영향권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내수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 역시 뮤지컬 시장의 확대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내 뮤지컬 시장은 1200석 이상의 대극장 작품과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중소극장 작품으로 양분된다. 작품의 편수로 치면 중소형 뮤지컬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해 제작된 2778개의 뮤지컬 중 60~70%가 중소규모 공연장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실제 뮤지컬 티켓 판매액의 대부분은 1200석 이상의 대극장 작품이 가져갔다. 중소형 제작사의 작품은 수익 창출이 쉽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을 지낸 이유리 서울예술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지난해 뮤지컬 시장의 매출이 성장한 것은 고무적이나, 내수 시장은 작은 땅과 적은 인구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뮤지컬 전용관’이 부족하다는 점도 한국 시장의 취약점으로 꼽힌다. 현재 국내에서 대형 뮤지컬을 올릴 수 있는 공연장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샤롯데씨어터, 블루스퀘어, 디큐브아트센터 등 10개 정도. 극장 중심으로 클러스트가 형성되는 뮤지컬 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극장들이 모여있지 않은 데다 그 수도 적어 뮤지컬 시장이 확대되기가 어려운 구조다.
일본 다카라즈카 극단의 나카무라 카즈노리 이사는 “한국은 브로드웨이나 도쿄와 달리 극장이 밀집돼있지 않은 데다, 대극장 수요가 부족하다”며 “대학로에 중소극장이 밀집해 있지만,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대극장이 적어 시장 성장이 가로막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작사들은 공연장 선점 경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이 단장은 “뮤지컬은 롱런 비즈니스라 장기 공연을 통해 수익 창출이 되는데, 1000석 이상 극장이 한정돼 있다 보니 공연 일수가 짧아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뮤지컬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는 1000석 이상의 극장이 40여개 모여 있어 하나의 큰 시장은 물론 숙식, 여행 등 모든 비즈니스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중소극장이 몰려 있는 대학로라고 해서 여건이 달라지진 않는다. 작품 편수가 많아 경쟁은 치열하고, 티켓 가격과 관객수에 비해 제작비가 높아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 단장은 “최근 300석 이하 소극장 뮤지컬의 제작비는 10억원 대로 치솟았다”며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객석 점유율이 70%는 돼야 하는데 국내에선 수익 구조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우려했다.
내수 시장의 한계는 국내 제작사들이 해외로 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최근 몇 년새 한국 창작 뮤지컬의 해외 진출 사례가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대형 제작사와 중소 제작사의 ‘투 트랙 전략’이 통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디컴퍼니, CJ ENM 등 대형 제작사들은 ‘자력 갱생’으로 브로드웨이의 문을 두드리고, 중소 제작사는 정부 지원을 통해 해외 시장 진출을 도모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창작 뮤지컬을 지원하는 ‘K-뮤지컬국제마켓’에선 올해도 해외 진출작이 나왔다. 홍컴퍼니의 ‘라흐헤스트’는 오는 10월 브로드웨이에서 열리는 K-뮤지컬 로드쇼에 참가하게 됐다.
이 단장은 “대형 제작사에서 만든 높은 인지도를 담보한 큰 규모의 콘텐츠들이 해외 시장을 개척해 소재와 형태 면에서 다양한 한국 창작 뮤지컬들이 해외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활로를 만들고 있다”며 “자연스러운 윈윈이 뮤지컬 업계에 구축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해외 진출을 위해 국내 뮤지컬 업계가 넘어야 할 관문이 많다. 라이선스 수출이 가장 보편적인 콘텐츠 진출 사례인 만큼 해외 시장 겨냥을 위한 콘텐츠 제작이 필수다. 이 단장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콘텐츠는 무엇인 지에 대한 고민이 개발 단계에서부터 진지하게 이뤄져야 생명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K-뮤지컬 자체가 글로벌 고객들에게 마냥 흥미로운 콘텐츠는 아니다. ‘N차 관람’을 하는 ‘2030 덕후 관객’들이 주도하는 시장의 특성으로 인해, 이들이 좋아할만한 여성 서사 콘텐츠나 한 인물의 성장을 깊이 들여다 보는 ‘역사적 위인’을 다룬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그만큼 콘텐츠의 다양성이 떨어진다.
지혜원 경희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뮤지컬은 국내 시장의 특성에 맞춘 작품이 대다수로 전 세계에서 통할 보편적인 이야기가 많지 않다”며 “학습을 통해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작품이나 역사적 위인들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아 해외 시장에선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고 꼬집었다.
지 교수는 이어 “아시아는 물론 영국, 미국, 유럽까지 진출하려면 해당 시장과 관객을 이해하고, 트렌드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각각의 시장과 관객 분석을 통해 해외 관객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작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단장도 “뮤지컬 본고장으로 진출할 때 기존 문법을 답습한 완성도로는 본토의 경쟁력을 따라갈 수 없다”며 “다양한 소재와 독창적인 한국 창작 뮤지컬의 문법을 찾아 서구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날이 치솟는 제작비와 인건비로 제작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만큼 지원 사업을 통한 해외 진출은 국내 뮤지컬 산업의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고 있다. 다만 이제는 지원의 다변화도 고민할 때다. 현재 정부의 지원은 국내 시장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작품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을 돕는다. 창작 단계나 진출 이후 정착과 확장을 위한 뒷받침은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지 교수는 “글로벌 유통을 염두해 작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해외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해외 제작사들과 꾸준한 네트워크를 갖출 수 있도록 지원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건전한 뮤지컬 생태계 조성을 통한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2770여편의 뮤지컬을 365일로 나누면 하루에 7편씩 올라갔다는 이야기”라며 “편수가 많다고 한국 뮤지컬의 활성화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기형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눈앞의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며 “합리적 지원책을 꾸준하게 이어가야 한국 영화처럼 한국 뮤지컬의 르네상스가 펼쳐질 것이라 본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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