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사랑한 사람들』 스트레이치 “빅토리아는 고집불통에 감정적, 미덕은 정직…결국 그녀도 인간” [김용출의 한권의책]

김용출 2023. 7. 1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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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들이 활짝 열리고 여러 경과 명사, 주교, 장군, 각료가 지켜보는 가운데 작고 날씬한 소녀가 깊이 애도하는 얼굴로 홀로 방에 들어와 보기 드물 정도로 우아하고 위엄 있게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여왕의 얼굴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매력적이었고, 금발과 튀어나온 파란 눈, 작고 약간 굽은 코, 윗니가 보일 정도로 벌어진 입, 조그만 턱, 깨끗한 피부에 전체적으로는 천진함과 엄숙함, 젊음과 평정심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인상이었다. 여왕의 높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게 울려 퍼졌다. 회의가 끝난 후 여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아하고 위엄 있게 혼자서 신하들 사이를 지나갔다.”(69쪽)

1837년 6월 20일 새벽, 대영제국의 국왕 윌리엄 4세가 숨을 거두자마자 가장 가까운 친척인 열여덟 살의 빅토리아가 윌리엄 4세의 뒤를 이어서 영국 여왕에 즉위했다. 그날 오전, 그녀는 어전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대영제국 여왕으로서 첫 공식 업무를 수행했다. 우아하고 위엄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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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는 18년 전인 1819년 런던 켄징턴 궁전에서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 코부르크의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랐고, 외숙부이자 나중에 벨기에 국왕이 되는 레오폴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1827년 영국 의회에 의해 후계자로 인정됐다. 빅토리아는 영국 여왕에 오르던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신의 섭리로 이 자리에 오르게 됐으니 온 힘을 다해 조국에 대한 의무를 이행할 것이다. 비록 어리고 많은 부분에서 미숙하지만, 나만큼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국무를 수행하겠다는 의지와 소망이 넘치는 사람은 없으리라 확신한다.”(68쪽)

빅토리아는 즉위 뒤 버킹엄궁전으로 들어가면서 늘 자신을 간섭하던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러진 방으로 쫓아냈고, 코로이 역시 연금을 주어 퇴직시켰다. 레오폴트 역시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각의 경고를 받으면서 그녀는 비로소 단독자가 될 수 있었다. 어머니를 내치던 즉위 첫날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어머니, 정말 제가 여왕이 된 건가요?” 빅토리아는 첫 어전회의를 마친 후 곁방을 지나가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래, 딸아, 네가 이 나라의 여왕이란다.” “그럼 어머니, 제가 여왕으로서 드리는 첫 부탁을 들어주세요. 한 시간 정도 혼자 있고 싶어요.” 그녀는 한 시간 동안 홀로 시간을 보낸 뒤 밖으로 나와서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침대를 어머니 방에서 옮기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평생 고대하던 순간이 왔는데, 딸이 영국 여왕이 된 바로 그 순간에 그녀의 운명은 곤두박질쳤다. 공작부인은 자신이 권세와 신망, 권력에서 돌이킬 수 없이 철저하게 배제되었음을 깨달았다...여왕 즉위 후 한 달이 되지 않아 새로운 현실이 윤곽을 드러냈다. 모든 왕실 살림이 켄징턴궁에서 비킹엄궁으로 옮겨졌고, 켄트 공작부인은 딸의 침소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방을 배정받았다.”(75-76쪽)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 직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1832년부터 선거법 개정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시작되면서 정치사회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휘그당을 지지했고, 보수적 토리당과 그 후신 보수당을 싫어했다. 어머니를 비롯해 친인척 측근을 몰아낸 그녀는 즉위 직후 매일 1시간 이상 휘그당 출신의 멜버른 총리를 만나서 일을 배우고 익혀나갔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대신들이 수많은 문건을 들고 오지만, 그래도 나는 이 일이 즐겁다.” 빅토리아는 즉위 직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일주일 뒤 일기에도 다시 이렇게 썼다. “전에도 말했듯이 대신들이 수많은 문건을 들고 오고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문건도 많다. 매일 서명해야 할 서류가 얼마나 많은 지 할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 일이 즐겁다.”(90쪽)

즉위 2년 뒤인 1839년, 그녀는 자신이 싫어하던 궁중 시녀 플로라 헤이스팅스가 질병으로 숨지면서 궁중극이 벌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지지 여론이 준 데다가 자신의 정치적 후견자였던 멜버른 총리가 한때 실각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1840년 2월, 빅토리아는 외사촌이자 독일계 왕족인 작센 코부르크의 앨버트 공작과 결혼했다. 앨버트는 처음 별 영향력이 없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여왕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됐고, 나중에는 왕실의 국정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마흔두 살이던 1861년, 남편 앨버트가 저 세상으로 떠났고, 빅토리아는 큰 충격을 받아서 한때 국무에 손을 떼고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앨버트와 사이에 4남 5녀를 낳았던 그녀는, 편지에서 당시의 비통과 슬픔을 이렇게 적었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아버지를 잃은 가여운 아기는 이제 짓밟힌 행복에 비통한 눈물을 흘리는 마흔두 살의 과부가 되었습니다! 행복했던 제 삶은 이제 끝났습니다! 제게는 이미 끝난 세상입니다!”(275-276쪽)

남편 앨버트의 죽음은 빅토리아의 삶과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실제로 그녀의 긴 생애 가운데 후반부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앨버트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는 베일이 드리워진다. 아주 가끔, 어쩌다 한 두 번씩 베일이 걷혀 중요한 맥락과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일부 전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추측에 근거하며 확실하지 않다.”(271쪽) 대신, 시종이었던 존 브라운과 급속도로 친해져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빅토리아는 여왕으로서 당대의 정치가였던 파머스턴과 글래드스턴, 디즈레일리, 베켄즈필드 등과 제국 운영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했다. 파머스턴과 자주 긴장했던 그녀는 휘그당 출신의 글래드스턴 역시 불신과 반감의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글래드스턴이 1869~1874년 하원을 장악한 뒤 각종 개혁을 추진했는데,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의 개혁을 지켜봤다고 한다.

“글래드스턴의 정책도 용납하기 힘들었지만, 그에게는 여왕의 심기를 훨씬 더 건드리는 다른 요소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대하는 총리의 개인적인 처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오로지 공적 기관으로만 여겨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글래드스턴의 열성과 헌신,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말투, 깎듯한 인사, 꼼꼼한 품행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306쪽)

그녀는 처음 보수 정치인 디즈레일리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디즈레일리가 빅토리아의 처지를 이해해 주면서 좋은 관계로 바꿨다. 1874년 총선에서 토리당이 승리하면서 총리가 된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남편 앨버트에 대해선 경건한 추도를 보내는 한편, 여왕에겐 아부에 아부를 두텁게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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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폐하의 다정한 마음을 얻는 것보다 영광스럽고 보람된 일은 없습니다. 지금 제 생각과 감정, 의무와 애정은 온전히 폐하께 가 있으며, 저는 그저 남은 인생 동안 폐하께 봉사하고 그럴 수 없게 되더라도 이 시간을 생애 가장 즐겁고 황홀했던 순간으로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디즈레일리는 또 이렇게도 썼다. “저는 오직 폐하를 위해 살고, 폐하를 위해 일하며, 폐하 없이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315쪽)

빅토리아의 말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였다. 제국이 번영한 데다가 오랜 집권으로 여왕은 영국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하면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여왕의 말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였다. 국민의 현혹된 상상 속에서 빅토리아는 가장 순수한 영광의 빛나는 구름을 타고 신성의 영역을 향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비난은 잠잠해졌고, 20년 전이라면 어디서나 인정되었을 결점이 이제는 어디서나 무시되었다.”(363-364쪽)

제2차 보어전쟁이 한창이던 1901년 1월, 빅토리아는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무려 64년간 군주로 재위했다. 엘리자베스 2세에 이어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영국 군주였다. 장남 에드워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전기문학의 거장이자 버지니아 울프,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함께 ‘블룸스버리 그룹’의 일원이었던 저자는 책 『여왕이 사랑한 사람들』(김윤경 옮김, 글항아리)에서 어머니 켄트공작 부인, 하노버 출신의 가정교사 레첸, 남편 앨버트, 멜버른 총리와 파머스턴, 글래드스턴, 베컨즈필드 등 그녀가 열렬히 사랑했거나 증오했던 7명의 인물을 통해서 빅토리아 여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저자는 책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 레첸, 외숙부 레오폴드 등은 빅토리아에게 제왕적 가치관 형성에 기여했고, 남편 앨버트는 밤새워 춤추기를 즐기던 그녀를 서류 더미 앞으로 불러냈으며, 멜버른과 파머스턴, 글래드스턴 등은 때로는 의기투합하거나 대립을 통해서 제국을 움직여 나갔다고 분석했다.

책에선 빅토리아의 약점도 많이 지적됐다. 저자에 따르면, 빅토리아 여왕은 보수적이고, 고집불통이었으며, 그렇게 지적이지도 못했다. 심지어 군주답지 못하게 걸음걸이마저 촐싹거리고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본인이 여성이면서도 여성 인권 향상에 혐오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빅토리아 여왕은 정직하고 진실했다. 정직한 아이였던 빅토리아는 죽을 때까지 진실성을 간직했다고, 저자는 주목했다. 빅토리아는 사랑과 증오부터 고집까지 가까운 정치인은 물론 국민들에까지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책은 빅토리아 여왕의 삶과 성취에 대해서 시간 흐름에 따라 관계 중심으로 그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다양한 인간적인 측면이나 정책 결정의 배경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영국이 제국주의로 뻗어나간 순간, 주요 사건과 고비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좀 더 규명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19세기 세계를 움직인 핵심 인물이었으니까.

빅토리아 재위 시기는 영국이 영토 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제국주의로 가속화한 시기였다. 특히 1877년부터 영국 국왕 최초로 인도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는 등 대영제국은 세계 대륙의 4분의 1을 통치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고, 그녀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불렸다. 비록 빅토리아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 군주제의 원칙 때문에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비공식적인 영향력은 막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글항아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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