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번이라도 배부르고 싶어서…” 탈북 여작가가 살아가는 이유[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엄마, 딱 한 번이라도 밥을 실컷 먹고 싶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 딸이 부르튼 입술을 애써 놀리며 말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인 것을 서로가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비수가 돼 엄마의 가슴 속 깊이 아픔으로 박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너를 위해 엄마가 목숨 한 번 걸어보지 못했구나.”
엄마는 가족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12년 뒤인 2014년, 엄마는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는 ‘제41회 한국소설 신인상’에 당선됐다. 탈북민이 한국 문학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선작 제목은 ‘밥’이었다. 그가 쓴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자서전이었다.
20세기 초반 최서해의 ‘탈출기’가 우리 민족의 비참한 삶을 고발하는 빈궁 문학의 대표작으로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면, 단편소설 ‘밥’은 북한 실상을 고발하는 21세기 ‘탈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탈출기는 완성형이 아니다.
단편소설 밥은 10년 전 북한을 탈출한 모녀가 한국에서 배불리 먹고 살면서 북에 남겨진 남편과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내용이다. 딸은 밥알을 씹을 때마다 행복에 겨워 “밥이 참 맛있다”고 감격한다. 그리고 북에 사는 아버지에게 함께 와서 살자고 연락을 하지만, 아버지는 북한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장군님을 배신할 수 없다며 울먹이는 아버지는 끝내 지옥의 땅에 남았다. 이들은 이산의 아픔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엄마는 이후 연달아 소설과 시집을 발표했다. 2019년엔 서울시인협회 추천신인상 공모전에 ‘장마당에서’ 외 4편의 시까지 당선되면서 작가와 시인 자격까지 다 공식 획득했다.
김정애 국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 하루아침에 뒤바뀐 운명
태어날 때 자기 운명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김정애 씨처럼 갑자기 운명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처절한 고통을 딛고 다시 부활한 사람은 많지 않다.
북한에선 ‘출신성분이 좋다, 나쁘다’를 ‘토대가 좋다, 나쁘다’라고 표현한다.
1968년 1월 2일 김 씨가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했을 때 그의 집은 토대가 매우 좋은 집이었다. 아버지 쪽도 좋았지만, 어머니 쪽은 피살자 가족으로 분류됐다. 6·25전쟁 때 가족이 국군이나 치안대에게 학살당한 사람을 피살자 가족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전쟁 직전 황해남도 연안군 보건부장 겸 군 병원 원장이었다. 남동생 두 명도 같은 병원에서 의사로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한동안 병원을 떠나지 못했던 아버지 3형제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국군에 의해 끌려갔다. 국군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두 동생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버지의 시신은 없었지만, 북한은 3형제가 함께 살해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 김씨의 외할아버지는 피살자가 된 것이다.
피살자 가족은 노동당이 맡아서 키워야 하는 대상이다. 김 씨의 어머니는 평양경공업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 견본관 식품실장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김 씨가 고등학교 졸업을 6개월 앞두고 김형직사범대학에 입학해 작가가 될 꿈을 꾸고 있던 때 갑자기 토대가 바뀌었다. 외할아버지가 피살된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월남했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졸지에 김 씨는 반동가족에 해당하는 월남자 가족이 됐다. 월남자 가족은 대학에 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때부터 김 씨의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가난에 노출돼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김 씨는 한국에 온 뒤 북에 있을 때 그토록 저주했던 외할아버지부터 찾았다. 그런데 남쪽에는 외할아버지의 흔적도 없었다. 목격자라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김 씨와 가족의 운명은 졸지에 바뀌었다. 바뀐 운명은 김 씨를 탈북 여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 빠다를 먹던 아이
김 씨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다. 아버지는 외화벌이 업체 소속으로 함경북도에 단 4대만 있는 15톤짜리 러시아제 트럭 운전수였다. 북한에서 물자를 나르는 운전수는 특권이 대단하다. 물류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씩 많은 짐을 날라주면 사례비가 두둑하다.
어머니가 다니는 도 견본관은 도에서 나오는 각종 상품을 분석해 유해성 여부를 판단한 뒤 생산허가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특히 식품실장은 도내에서 생산되는 식료품공장들의 당과류, 술, 장 등 모든 식품의 판매 승인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견본관 식품실 사람들은 샘플로 들어온 식품 실험을 마치면 폐기하지 않고 나눠가졌다.
이런 부모를 둔 덕분에 김 씨의 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 살았다. 집에 각종 육류와 당과류가 넘쳤다. 인민반 회의에 가면 “왜 정애네 집 뜨물(음식물 쓰레기)을 인민반장만 가져가냐”고 싸움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의 집 뜨물엔 비계가 떠다녔다. 인민반장은 김 씨 집에 특혜를 주는 대신 그 뜨물을 받아다 돼지를 키웠다.
김 씨는 80년대 초반에 학교에 가기 전 밥을 ‘빠다(버터)’에 비벼 먹고 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식단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빠다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도 못할 때였다.
학교에서도 김 씨는 단연 인기였다. 월동 준비할 때면 아버지가 학교에 석탄 대여섯 트럭씩 싣고 왔다. 북한에선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어마어마한 후원이었다.
그 덕분에 김 씨는 학교에서 분단위원장, 초급단체 위원장 등의 학생 최고 간부를 맡아 부럼 없는 생활을 했다.
● 문학소조원이 되다
13살 때 문학선생님이 불렀다.
“정애야, 내가 좋은 곳에 추천해줄 테니 거기 가봐. 너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잘 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추천한 곳은 도 작가동맹 작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작가 양성 프로그램인 문학소조였다.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을 선발해 각종 창작기법과 시, 소설, 수필, 수기, 기행문 등을 쓰는 창작기법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여기서 우수한 대상은 ‘전국글짓기현상응모전’에 출전하게 된다. 당선되면 도 작가동맹은 당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구조였다.
김 씨는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문학소조라고 불리는 작가 양성반에 갔다. 학교에선 2명, 구역(구)에선 모두 20명이 선발됐는데, 얼마 뒤엔 8명이 그만두고 12명만 남았다.
김 씨는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부친은 출장 갔다올 때마다 새로 나온 책을 구해서 집에 가져왔는데, 그 덕분에 그는 북한에서 번역 출판된 외국소설은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읽는 것과 직접 쓰는 것은 달랐다. 주제는 어떻게 잡고, 종자는 어떻게 만들며, 줄거리는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 등의 이론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만두려 했지만, 부친이 말렸다. 문학소조 경력이면 작가를 양성하는 김형직사범대학 국문학부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방과 후엔 문학소조에 다니는 생활이 반복됐다. 몇 년 뒤엔 아예 몇 달씩 학교에 가지 않는 때도 있었다.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이 다가오면 12월부터 등록된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작품을 쓰게 했다. 가을엔 또 9월 9일 북한 건국절,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맞아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김 씨는 점점 글 쓰는 기계가 되어갔다. 대신 수학과 물리 등 학교에서 배워주는 과목은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 북한식 ‘문학급제’ 시험
북한에서 작가동맹 회원이 되려면 나름 기준이 엄격하다. 작가가 되기 전 거쳐야 하는 후보 작가가 되는 것부터 하늘의 별 따기였다. 김일성대나 김형직사범대 국문학과를 나오면 후보 작가로 인정해준다. 그러나 그런 대학에 가지 못한 일반인은 후보 작가가 되기 전 또 문학통신원 자격을 얻어야 한다. 문학통신원은 중앙지에 작품이 6번 실려야 한다. 문학통신원이 되면 월마다 글을 써서 내는 과제가 있다. 단편소설이나 시를 써서 인정받을 만한 출판 경력을 쌓아야 심사를 거쳐 후보 작가로 인정해준다.
작가가 됐다고 해서 별다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후보 작가쯤 돼야 학교 선생이 되거나 출판사에 자리를 얻는다. 작가가 된다고 해도 처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그 명예마저 잡겠다고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다.
북한은 당시 1년에 한 번씩 같은 날짜에 각 도에서 문학경연을 열었다. 김 씨처럼 학생 문학 소조원부터 문학통신원을 지망하는 군인, 대학생, 사무원, 노동자, 농민 등 어른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주어진 주제를 놓고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써서 우수작을 가려내는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흡사한 시스템이었다.
김 씨도 선발되어 중학생 자격으로 도 글짓기현상응모전(문학경연)에 나갔다. 이것도 원하면 누구나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문학소조에서 5명만 선발돼 내보냈다.
‘제철소에 대한 수필을 쓰시오’, ‘농장에 대한 기행문을 쓰시오’라는 식으로 주제가 나오면 참가자들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그동안 연습한대로 열심히 작품을 써내려갔다.
응모전에 참가한 김 씨는 번번히 입선하지 못했다. 사실 이런 문학경연도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 씨도 문학소조 시절 자기의 창작물을 뺏긴 적이 있다. 어느 날 학생잡지에 실린 시를 보니 제목과 단어 몇 개만 바뀌었을 뿐 분명 자신이 쓴 것인데, 발표자 이름은 높은 간부집 자식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그들을 가르치는 작가가 김 씨의 시를 빼돌려 간부에게 아부를 한 것이었다. 그때 그는 문학소조를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부모들이 하도 목표로 삼은 김형직사범대에 가려면 참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 물거품이 된 꿈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학교사가 되려던 김 씨의 꿈은 중학교 졸업을 반 년 앞두고 깨졌다. 신분 재조사에서 갑자기 외할아버지 신원이 피살자에서 월남자로 바뀌면서 그는 대학에 갈 수가 없게 됐다. 이런 성분이면 교사는 고사하고 유치원 선생도 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식품실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에 대해 그가 느낀 감정은 원망이 아니었다. 증오였다. 수령과 당을 찬양하는 글쓰기를 배우며 세뇌된 그에겐 북한 당국에 대한 원망이 조금도 없었다.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정무원 돌격대에 자원 입대했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죄’를 씻고 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선 자신이 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돌격대에서 노동당원이 되는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였다.
그는 문학소조 경력을 인정받아 돌격대 직관원이 됐다. 직관원은 돌격대의 성과를 포스터로 크게 써서 속보로 알리는 자리였는데, 글도 잘 써야 했고 그림도 잘 그려야 했다. 그가 속한 돌격대는 이후엔 무산광산 광부주택, 청진 주재 러시아영사관 등의 도내 공공건설을 했다. 그러나 노동당에 입당하려는 꿈은 시간이 흐를수록 허망하게 느껴졌다. 돌격대에서 10년 넘게 일해 30세가 다 되도록 입당을 못한 노처녀가 부지기수였다.
절망한 그에게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농촌 출신 소대장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김일성의 접견자라고 자랑하며 자신과 결혼하면 출신성분이 바뀔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몇 분 이상 만난 사람을 접견자라고 한다. 접견자가 되면 당국에서 혜택을 준다고 했다.
그때 김 씨는 여러 가지로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당의 꿈은 멀어지는데다, 출신성분이 바뀐 부모가 계속 싸워 가정적으로도 파탄지경에서 별거를 하고 있었다. 자포자기 심정이 된 그는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고, 접견자 가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을 세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살에 그는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했다.
● 구박받던 도시 며느리
결혼 후 돌격대에서 제대하고, 시집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선택이 최악이었음을 깨달았다.
시집은 청진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이었는데, 그 집에는 70세 넘은 시어머니와 5세 정신연령의 지체장애 시형이 살았다. 집안에 낡은 세수수건조차 1개밖에 없었고, 양말은 10번씩 덧대 기워서 가죽 같은 것을 신고 다녔다. 쌀독은 바닥이 드러나 텅텅 비어 있었다.
접견자 가족이 되면 성분이 바뀐다는 말도 잘못 안 것이었다. 남편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현장시찰을 나온 김일성을 만나 따라다닌 것은 사실이었지만, 접견자 혜택은 장남에게만 부여됐다. 장남은 대학에 갈 수 있고, 간부도 될 수 있었다.
남편은 8형제 중 일곱째라 접견자 혜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지청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농촌에는 튼튼한 여자가 필요한데 어디서 불도 지필 줄 모르고, 잡초도 구분하지 못하는 가냘픈 어린 도시 여자를 데려왔냐며 늘 불만이었다. 자기 집은 접견자 집안인데, 며느리는 월남자 집안이라며 토대 타령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북한은 이혼을 잘 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극히 희박한 이혼이라는 것을 한다고 해도, 이혼녀의 신세는 병자호란 이후 환향녀 신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결혼 이후 남편은 돌격대를 따라 늘 외지를 나돌았다. 결혼 초기엔 평양시 광복거리 건설에 동원돼 1년에 한두 번씩 집에 왔다. 그런 와중에 딸이 태어났다. 뒤따라 아들도 태어났지만, 아플 때 약이 없어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얼마 안 돼 다시 아들이 태어났다.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것이 그의 몫이 됐다. 손에 피멍이 들도록 처음 해보는 농사일에 적응했다. 심지어 5세 지능의 시형을 씻기고 머리를 손질하고 수염을 밀어주는 것까지 그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도움도 받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직장에서 쫓겨난데 이어 아버지까지 간경변으로 쓰러져 운전기사를 그만뒀다. 그의 친정집도 급속히 가세가 기울어졌다.
가뜩이나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살고 있던 차에 1990년대 중반의 엄혹한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풀을 뜯어 먹었다. 잡초도 구분하지 못하던 그는 나중에 산에서 나는 모든 풀에 대해 전문가가 됐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이때 시형도 굶어죽었다. 정상적인 사람도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장애인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열 살을 갓 넘긴 딸이 엄마 품에 안기며 말했다.
“엄마, 딱 한 번만이라도 밥을 실컷 먹고 싶어.”
● 강 너머 마주친 신기한 세상
김 씨는 그런 삶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고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도처에서 탈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시골에 사는 그도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엄마 구실 못하는 내가 살아서 무엇하랴. 꼭 중국에 가서 가족을 살리리라.”
김 씨는 딸과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집을 나섰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선을 찾아 중국으로 무사히 넘어가는데 성공했다. 김 씨는 중국 땅에 처음 들어서던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강을 넘으니 앞에 무연한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비쩍 말라 이삭을 겨우 맺는 북한 옥수수에 비해 중국 옥수수는 크기도 두 배 이상 컸다. 한 그루에 그런 이삭이 두 개나 달렸다.
강을 넘느라 배가 고픈 그는 옥수수를 따려 했다. 그런데 중국에 오자마자 도둑이 되긴 싫었다. 주인을 찾아 밭을 헤맸지만, 그 큰 밭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북한 같으면 엉덩이만한 땅도 남이 훔쳐갈세라 가족들이 돌아가며 밤낮으로 경비를 섰는데, 중국은 그 큰 밭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옥수수 밭을 지나가니 이번엔 과수원이 펼쳐졌다. 사과, 배가 잔뜩 달린 가지가 땅에 늘어져 있었다. 땅에도 떨어진 과일이 가득했다. 신기하게도 과수원도 경비가 없었다. 그는 땅에 떨어진 과일을 주워먹었다.
강 하나를 두고 이렇게 판이하게 차이 나는 세상이 존재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런 땅을 옆에 두고 북에서 굶었던 시절이 너무나 억울했다. 아니, 너무 억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외딴집을 발견하고 도움을 구하러 들어갔다. 노부부가 살았다. 그를 보더니 “아이고, 딴 사람들은 온지 오랜데 왜 이제야 왔냐”고 했다. “아니, 처음 본 사람에게 왜 이리 잘해주지?” 그 땅에 사는 사람도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밥을 먹자마자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노부부가 그새 다시 밥상을 차려 내왔다.
상에서 돼지고기, 소고기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너무 굶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김 씨는 밥상 아래에서 다리를 꼬집어봤다. 아픔이 느껴졌다. 현실이었다.
밥을 먹고 노부부가 거봉을 갖고 왔는데, 김 씨는 그렇게 큰 포도를 본 적이 없었다.
“왜 장난감을 씻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부가 그걸 뚝뚝 따서 입에 넣었다.
“세상에 이런 과일도 있구나….”
● 소원을 이룬 날
노부부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찾았다.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돼지축사나 건설현장, 농장 같은 곳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처음 탈북할 때는 돈을 벌어 돌아가려고 했지만, 중국에 와보니 그럴 생각이 없어졌다. 이렇게 배부르게 사는 나라가 있는데, 아이들도 이런 곳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뒤 그는 다시 북에 들어갔다. 남편은 굶어죽어도 혁명가를 부르다 죽을 위인이었다. 남편에게 탈북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아이들을 몰래 데리고 나와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직후 일하면서 안면을 익혔던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탈북 스토리를 알고 있던 사장은 산속 움막에 소머리 하나를 들고 왔다.
밥 한 번 실컷 먹는 게 소원이던 딸은 16살에 그날 처음으로 배를 채워봤다. 밥이 아닌 소고기로. 북한에 살 때 고기를 먹여본 적이 한 두 번은 있었지만, 가난한 살림에 기껏 한두 점이나 먹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소고기는 구경도 못했다.
김 씨는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삐쩍 마른 아이들이 끝이 없이 먹고 또 먹는 것이었다. 어디로 저 많은 고기가 사라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소머리 하나가 거의 사라질 즈음 마침내 아이들이 손을 멈췄다.
“엄마, 지금 우리 목젖까지 고기가 찼어.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처음 먹어봐.”
● 목사를 감동시킨 일기
아이들까지 데리고 연변에서 머무르기는 너무 위험했다. 김 씨는 2003년 청도로 이동했다. 거기서 또 일감을 찾아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청도에선 한인 교회도 찾아갔다. 목사가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여러 가지로 도와도주었다.
농사도 짓고, 파출부도 하고 때론 돼지 300마리를 혼자 키우기도 했다.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좋았지만 늘 불안한 처지였다.
중국에서 김 씨는 북한에서 쓰던 ‘당정책 학습노트’만한 공책을 하나 구했다. 북한엔 당정책 교육 때 받아 적는 ‘당정책 학습록’이라는 A4 크기에 200매가 되는 두툼한 노트가 정해져 있다. 그 책에 짬이 날 때마다 자기 이야기를 적었다. 중국에서 경험한 놀라운 소감과 자신의 심정은 물론이고 틈틈이 수십 편의 자작시도 썼다.
북에 있을 때는 글쓰기가 그렇게 싫었는데, 왜 중국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게 됐는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몸에 밴 글쓰기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매일 있었던 일을 기록하면서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달랬을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그렇게 2년 8개월 정도 살았을 때 탈북민들이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도 한국으로 떠나리라 생각했다. 브로커는 찾지 못했지만, 중국에서 불안하게 살기보단 위험해도 사막을 횡단해 몽골로 가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전날 그는 한인 목사에게 책을 맡겼다. 행여 탈출과정에 잡혀 북송되면 중국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적은 글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상범, 정치범으로 낙인 찍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목사가 급히 그를 찾았다.
“어제밤 우리 부부가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밤새 눈물만 흘렸습니다. 절대로 떠나지 마세요.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몽골은 위험하니 사흘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목사는 한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흘 뒤 청도로 돌아와 김 씨에게 휴대전화 하나와 1500위안을 건네주었다.
“이제부터 이 전화에서 시키는 대로 가세요.”
목사는 한국으로 가는 브로커를 찾아온 것이었다. 김 씨의 일기에 감동한 목사는 이후에도 탈북민들을 계속 도왔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추방됐다. 목사의 이름은 조관식이다.
전화로 브로커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김 씨 일가는 베트남으로 가서 태국 영사관에 들어갔다. 이들의 진입 소식은 한국 언론에까지 보도됐다. 그리고 2005년 6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처음 탈북했을 때 그는 한국은 한족이 사는 나라인줄로 알았다. 청도에 와서야 한국이 남조선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생소한 동포의 땅에 마침내 긴 여정의 닻을 내렸다.
●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다
김 씨 가족은 하나원을 거쳐 2005년 11월에 서울 노원구에 정착했다. 세 식구가 살기엔 작은 18평의 영구임대주택을 받았지만 전혀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더운물이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난방이 보장되는 그 집은 세 식구가 처음으로 가져본 안정된 공간이자 천국이었다.
“이제 안정과 자유를 얻었으니 한 몸 다 바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그 자유를 마음대로 향유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북한에선 당국에서 시키는 일과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늘 고정돼 있었다. 창의적으로 살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밖에 나가기도 두려웠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또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김 씨는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동네 주변을 돌고, 다음엔 조금씩 거리에 나가봤다. 벼룩시장이라는 신문에서 직업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벼룩시장을 통해 교육비를 보장해준다는 미용학원에 등록해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또 교회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탈북민 정착을 위해 운영하던 자유시민대학이라는 6개월 정착교육 과정도 알게 됐다. 그곳에서 6개월간 여러 정착교육을 마칠 때쯤 “장애인재활원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공지가 떴다. 하지만 자원하는 탈북민이 없었다. 김 씨가 손을 들었다. 북에서 지체장애 시형을 돌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애인재단의 재활교사로 첫 직업을 얻었고, 3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그러는 과정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법도 알게 됐다. 컴퓨터로 타자를 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다시 솟아났다.
그러던 차에 탈북민이 운영하는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글도 쓰고, 또 자신이 경험한 한국을 북한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2010년 자유북한방송 기자로 취직했다. 정식으로 글을 쓰는 직업을 얻게 된 것이다.
● 작품 활동의 전성기
2011년 한국에선 국제PEN망명북한작가센터가 창립됐다. 국제PEN(PEN international)은 세계 작가들이 작품을 통한 문학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세계 작가 연맹이다. 현재 114개 국가에 144개의 PEN 센터가 설립되어 있다. 하지만 자유로운 글쓰기가 불가능한 중국과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에선 인권이 보장된다며 연맹 가입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 출신 문인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망명북한펜센터를 만들고 국제PEN에 가입신청서를 냈는데, 가입국 만장일치로 144번째 가입단체로 승인됐다.
김 씨는 망명북한펜센터의 첫 총무를 맡았다. 세계 최대의 문인단체 임원이 되니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더욱 넘쳐났다.
이후 김 씨의 작품 활동은 전성기를 맞았다. 대북라디오방송 기자를 하면서 짬짬이 창작의 의욕을 불태웠고, 2014년엔 한국소설가협회 제41회 소설 공모전에서 탈북 1호 등단 작가가 됐다. 2019년에는 서울시인협회에서 진행하는 제24회 추천 시인상 공모전에서 입상해 시인 등단의 꿈도 이뤘다.
2014년 쓴 단편소설 ‘소원’은 북한인권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둥지’ ‘북극성’도 출판했다. 단독 작품 활동과 별개로 여러 탈북 문인들과 한국 작가들과 공동으로 ‘국경을 넘는 그림자’ ‘금덩이 이야기’ ‘꼬리 없는 소’ ‘단군릉 이야기’ ‘원산에서 철원까지’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등 공동 소설집도 출판했다.
김 씨는 활발한 활동을 인정받아 2016년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으로 추대됐고, 지금까지 기자를 겸직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망명북한펜센터에는 현재 약 120여명의 탈북민 출신 회원들이 가입돼 있다.
망명북한펜센터는 1년에 한 번씩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문학지를 발행한다. 과거엔 문학지 발행에 정부의 지원이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두 번이나 예산 지원이 거절되는 바람에 김 씨는 사비를 들여 문학지를 발간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탈북 문인으로서 글을 남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느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고향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지금부터 우리가 기록을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북방송 기자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도 제가 느낀 행복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 “엄마, 쌀이 참 맛있지?”
김 씨와 함께 입국한 자녀들은 한국에 훌륭히 정착해 김 씨를 더욱 기쁘게 하고 있다.
딸은 서울 소재의 대학에서 방송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현재 정부 부처 소속 기자로 활동 중이다. 결혼해서 두 자녀를 낳았는데, 김 씨에게 손자들을 보는 낙을 더해주었다.
아들 역시 현재 건축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건축설계 과장으로 성장했다. 아들도 결혼해 자식을 낳았고, 지난해엔 자기 집도 장만했다.
김 씨의 가족은 지금도 자주 모인다. 그리고 푸짐한 밥상에 마주앉아 과거의 추억을 소환한다.
“엄마, 우리 옛날 북한에 있을 때 잔디만 빼고 다 먹었지?”
“그래, 독풀과 독버섯까지 오래 절였다가 독이 빠지면 먹곤 했지. 그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먹을 걸로 보였는데….”
딸은 한국에 온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음식 맛을 음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가 집중하는 맛은 밥이다. 습관처럼 “엄마, 이 밥은 쌀이 참 맛있지”라고 말할 때마다 김 씨는 “엄마, 딱 한 번만 밥을 실컷 먹고 싶어”라고 말하던 옛 모습이 떠올라 눈가에 눈물이 핑 돈다.
“지금도 북한 어디인가 너처럼 말하는 애들이 있을 거야.”
그의 눈은 먼 북쪽 하늘 어딘가에 머문다. 마음 속 어디선가 뜨거운 무엇인가가 불끈 솟구친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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