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묻어놓고 도망갔다"고?…'신라의 미소' 출토지에 무슨 일?[이기환의 Hi-story]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양 늘어섰다.(寺寺星張塔塔안行)”
서라벌을 중심으로 번성한 신라 불교의 위용을 표현할 때 흔히 이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의 멋들어진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렇게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선 사찰 가운데서도 ‘빅3’(통일기 이전)가 있죠. 흥륜사(527~544)와 영묘사(536년), 황룡사(553~566) 등입니다. 아무래도 그 중에는 황룡사가 대중적으로는 가장 유명하죠.
누란의 위기에 빠진 신라 왕조를 불심에 기대 지키려고 높이 80m가 넘는 9층 목탑을 세운 스토리가 심금을 울리고요.
무엇보다 절터와 함께 목탑터가 남아있으니 보는 이들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있습니다.
■왕까지 출가한 흥륜사
그러나 흥륜사와 영묘사 역시 둘째, 셋째 가라면 섭섭하죠. 먼저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사찰입니다.
특히 이차돈(506~527)의 순교(527)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법흥왕은 527년 첫번째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대소신료가 벌떼처럼 일어났고요. 왕의 최측근인 이차돈이 이를 수습하려고 순교를 자처했습니다. 이윽고 이차돈의 목을 베자 우윳빛 피가 흘렀고, 그제서야 모든 반대가 사그러들었죠.
법흥왕 때 짓기 시작한 흥륜사는 544년(진흥왕5) 가을에 최종 완성되어 낙성식을 여는데요.
절을 완성한 진흥왕은 ‘대왕 흥륜사’라는 현판을 내렸습니다. “말년에 출가한 진흥왕(혹은 법흥왕)이 법운(혹은 법공)이라는 법명으로 흥륜사의 주지가 되었다”(<삼국사기> <삼국유사>)는 기사가 눈에 띄네요.
이어 549년(진흥왕 10) 흥륜사 앞길에서 백관을 보내 중국 양나라가 보내준 부처 사리를 맞이했다(<삼국사기> ‘진흥왕조’ 기사가 보이고요. 또 <삼국유사> ‘흥륜사 금당십성’조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합니다.
흥륜사 금당에는 10명의 불교성인을 진흙으로 빚은 상을 모셨다는데요. 동벽에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을, 서벽에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등을 배치했다네요.
흥륜사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설화가 한 편 있죠. <삼국유사> ‘김현 감호’조입니다.
당대 신라에서 해마다 2월 서라벌의 남녀가 대거 흥륜사로 몰려와 펼치는 탑돌이 행사가 장관을 이뤘는데요.
원성왕(785~798) 연간에 훙륜사 행사에 참가해서 탑을 돌던 김현과 어느 처녀가 눈이 맞아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어 정을 통했답니다. 이 처녀가 실은 호랑이였고요. 거두절미하고, 이 이야기는 처녀(호랑이)가 스스로를 희생하고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김현을 벼슬길로 올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사찰
그렇다면 영묘사는 어떨까요. 창건시기가 선덕여왕 연간(635년)이라는게 눈에 띄죠.
즉 영묘사는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세가지 신비로운 예측)’로 유명한 사찰입니다.
‘지기삼사’ 중 하나가 영묘사의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절 인근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아내 전멸시킨 ‘신묘한 사건’입니다.(<삼국유사>)
영묘사와 관련된 이런 설화도 전합니다. 즉 진지왕 연간(576~579)에 흥륜사의 진자 스님이 미륵상 앞에서 “‘화랑으로 거듭난 미륵’을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구요. 전국을 돌며 ‘미륵선화(화랑으로 변신한 미륵)’를 찾았던 진자 스님이 마침내 영묘사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뛰놀고 있던 소년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소년이 바로 ‘미륵선화’라는 걸 알아차린 겁니다. 소년은 “내 이름은 미시”라고 소개했고요. 진자 스님은 미시랑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임금(진지왕)은 미시랑을 국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삼아 존경했습니다.
<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조는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한다”고 전했습니다. 영묘사는 미륵, 화랑과 불가분의 관계일 것이며, 화랑들의 추모 공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묘사가 배출한 인물 중에는 신라 최고의 조각가인 양지 스님(생몰년 미상)이 있습니다.
양지스님은 각종 소상(塑像·흙으로 빚어 만든 형상)을 만든 조각가였는데요.
<삼국유사>는 “양지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벽돌탑의 기와…등을 제작했는데, 백성들이 앞다퉈 진흙을 날랐다”(‘의해·양지사석’조)고 소개했습니다. 또 674년(문무왕 14) “왕이 영묘사 앞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생몰년 미상)의 육진 병법을 지켜보았다”((삼국사기> ‘문무왕’조)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라의 미소’ 수막새는 흥륜사 제작품?
이렇게 흥륜사와 영묘사는 황룡사를 방불케하는 숱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터’는 남아있는 황룡사와 달리 두 사찰의 정확한 위치는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되레 두 사찰의 위치를 두고 혼란만 야기되었어요.
사실 일제강점기에 흥륜사의 원위치를 멋대로 특정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1908년 경주에 대서소를 차려놓고 취미로 신라 문화재를 연구했다는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1882~1954)였습니다. 이 자가 1910년대 경주 시내의 절터를 조사한답시고 돌아다녔는데요.
당시 경주 사정동 일대에서 우연히 금당터로 보이는 기단과 석조, 석불 등이 발견되었는데요. 모로가는 당시 경주 주민들이 이 일대를 ‘흥륜들’이나 ‘흥륜원’이니 하고 부른다는 이유로 ‘흥륜사터’라고 특정했습니다.
이런 ‘선무당 사람잡기’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일본학자들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진홍섭(1918~2010)·황수영(1918~2011) 등 국내 학자들까지 아무 의심없이 ‘흥륜사터’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1963년엔 모로가가 지목한 그곳을 ‘사적=흥륜사터’로 지정했습니다.
‘얼굴무늬 수막새’ 출토지를 둘러싸고 혼선도 빚어집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1934년 경주 시내 야마구치(山口) 의원의 의사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인데요. 그런데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장이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수막새 출토지=사정리 흥륜사터’로 전하면서 “조사해보니 확실하다”고 못박았습니다.
■‘영묘사’ 양지스님의 작품설 부각
하지만 갈수록 심상찮은 발굴 결과가 잇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사정동=사적 흥륜사터’에서 잇달아 수상한 명문기와가 확인되었습니다.
즉 1976년부터 ‘사적 흥륜사터’이면서 얼굴무늬 수막새 출토지로 알려진 사정동 일대에서 ‘영묘지사(靈廟之寺)’ 또는 ‘대영명사조와(大令妙寺造瓦)’ 등 ‘영묘사’명 기와들이 수습됐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로가 이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흥륜사 절터는 다름아닌 영묘사터’라는 거죠.
그렇다면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영묘사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1965년부터 심상치않은 조짐은 있었습니다.
여기서 800m 쯤 떨어진 경주공고 내에서 매우 수상쩍은 유구와 유물이 나왔습니다.
운동장 정지작업 도중 건물터의 기단과 석등의 밑받침돌 등이 노출된 겁니다. 1987년 교사신축 때도 기와와 전돌류가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2008년 운동장 배수구 설치를 위한 발굴조사 결과 결정적인 명문기와편이 확인됩니다.
기와 뒷면에 ‘~왕(王·추정)’자와 ‘흥(興)~’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흥(興)’자의 윗부분은 ‘ㅗ’ 형태로 남아있었습니다.
이게 ‘왕(王)’자의 획으로 보였습니다. 또 ‘흥’자의 아랫부분엔 ‘십(十)’자과 같은 획이 보이는데요. 이것은 ‘륜(輪)’자의 ‘차(車)’ 변의 위쪽 획일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흥(興)’자의 윗글자가 ‘왕(王)’이고, 아랫글자가 ‘륜(輪)’라면 ‘~왕흥륜~’이 되는데요.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를 더듬어볼까요.
“진흥왕이 (법흥왕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라 백관을 통솔하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으므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현판을 내렸다”는 구절을 봅시다. 만약 ‘~왕흥륜~’이 맞다면 <삼국유사>의 ‘대왕흥륜사’ 구절과 부합되죠.
그렇지 않아도 <삼국유사> ‘기이 미추왕 죽엽군’조에는 “미추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반대로 흥륜사가 미추왕릉의 서쪽에 있었다는 얘기죠.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는 “흥륜사가 경주부 남쪽 2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경주 읍성내의 객사와 현재 경주공고의 실제거리는 1.2㎞인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언급한 ‘2리(약 1.3㎞)’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옛 기록에 등장하는 ‘영묘사’는 어떨까요.
<삼국유사> ‘흥법제상 아도기라’조는 “영묘사는 ‘사천의 꼬리쪽’(沙川尾)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천’은 오늘날의 경주 ‘남천’을 가리키는데요. 그렇다면 ‘사천미(沙川尾)’라는 표현은 ‘남천의 끝자락’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고려시대 공양구의 정체
이후 최근의 발굴성과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한 연구성과가 잇달아 발표되었는데요.
요즘은 ‘선무당’ 모로가가 ‘흥륜사터’로 특정해서 사적지정까지 된 절터를 ‘영묘사터’로 고쳐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얼굴무늬 수막새’의 출토지도 ‘영묘사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흥륜사터는 경주공고 자리에 있었다는 거고요.
그런데 며칠전 영묘사터(기존 사적=흥륜사터) 서쪽에서 하수관로 공사를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던 중 또 한차례 의미심장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습니다. 또다시 ‘영묘사(靈廟寺)’ 글자가 찍힌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요. 아무래도 이젠 ‘사적 흥륜사터’가 아니라 ‘사적 영묘사터’라 확정지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발굴에서 또하나 주목 받을만한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즉 통일신라~고려시대 사찰 관련한 건물지와 담장지, 우물 등의 유적과 청동 공양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겁니다.
무엇보다 고려 초기인 11세기 청동공양구와 의식구 등을 한가득 넣은 철솥이 묻혀 있었습니다.
솥 안에는 향로와 향완(향 그릇), 촛대 등의 청동공양구와 금강저 같은 청동의식구, 청동소완(반찬그릇) 등이 보였습니다. 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유물만 54점 정도 되었고요.
대체 11세기 영묘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화재청이 낸 보도자료는 이 출토유물의 성격을 일단 ‘퇴장(退藏) 유물’로 추정했습니다. 화재나 사고 등의 비상 상황을 맞아 급히 한곳에 모아 묻어둔 유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몽골군의 침략’ 기사가 소환되었습니다. 몽골군이 13세기 경주 일대까지 들어와 황룡사와 9층 목탑을 불태웠죠.
혹시 그 때 영묘사의 스님들이 전란을 피하기 위해 공양구 일체를 땅에 묻고 떠난게 아니냐는 추정이 나온겁니다.
■과연 스님들은 “나살려라” 도망갔을까
그러나 ‘퇴장 유물’로 추정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문화재청이 보도자료에 첨부한 ‘퇴장유구’의 사례가 10곳 정도 되는데요.
그런데 일각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라구요. <마하승기율>(스님이 지켜야할 계율을 정한 경전)은 “도적이 물건을 요구하거나 훔치러 올 때는 감추지 말고 내어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위기에 빠진 사찰을 두고 나몰라라 하고 도망간다? 그것도 온갖 귀중품은 땅에 묻고? 이것이 자칫 스님들을 매도하는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문화재청이 ‘퇴장유물’의 사례로 거론한 10곳의 발굴유적을 볼까요. ‘퇴장유구’로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즉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지진구’로 볼 수 있고요. 건물의 기단을 쌓을 때 나쁜 기운이 막으려고 각종 물품을 공양하는 ‘진단구’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중 ‘영국사터(서울 도봉서원)’ 발굴사례가 대표적인데요. 2012년 절의 건물터 기단에서 청동유물 79점이 일괄로 출토되었는데요. 특히 이 청동유물을 매납할 때 따로 구덩이를 판 흔적이 없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것은 영국사의 건물 기단을 조성할 때 일종의 진단의식을 펼친 뒤 청동 용품을 고이 모셔둔 흔적이라는 겁니다.
건물의 모서리에 구덩이를 파고 솥과 같은 대형 용기 안팎에 금속유물을 넣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남 창녕 말흘리 유적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2003년 건물터 모서리에서 금속유물을 겹겹이 채운 쇠솥이 발견되었는데요. 쇠솥에서 무려 500여점의 금동제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불전 장엄구나 의식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사례 외에도 ‘퇴장유물’이 아니라 ‘의례용 유물’로 파악해야 하는게 상식적이라는 견해가 주목을 끕니다.
이와 관련해서 인용되는 경전이 <불설다라니집경>입니다. 7세기(654년) 번역된 이 경전의 12권에는 ‘제단의 건립’에 쓰이는 공양물의 물목과 함께 납입하는 수량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중 병·접시·사라·쟁반·국자·향로·금은그릇 등 금속용기 11종(879건)와 금동령대, 오색납촉, 동촉경, 금·동향로보자, 거울 등 금속장엄구 9종(1131건)의 세부 목록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갖가지 식물과 향, 오곡, 여러 선신에게 바칠 꿀과 기름, 떡 등 음식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내유적에서 확인된 유물을 경전(<불설다라니집경>)에서 권장하는 납입물목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마침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가 정리해놓은 논문이 있네요.
말흘리의 경우는 깃대(幡)과 허리띠장식(패) 등에 해당하는 금동제품류가 충실하게 매납되었구요. 영국사터(도봉서원)과 청주 사뇌사터 출토유물의 경우도 수량은 부족하지만 <불설다라니집경>이 권장하는 품목들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 외 유적의 출토유물도 기단 조성을 위한 의례용 용기 및 장엄류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번 영묘사터에서 확인된 고려시대의 솥에서 출토된 유물도 그렇습니다. 최태선 교수는 “이들 유물은 <불설다라니집경>에 나와있는 ‘작단의식(기단 조성 때 지낸 진단 의식)’ 때 납입한 물목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봐도 전란을 맞아 스님들이 허겁지겁 각종 귀중품을 묻고 자리를 피했다고 섣불리 추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유물을 수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발굴유물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급히 이관되었다죠.
앞으로 정확한 성격파악과 민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에 영묘사터를 흥륜사터로 잘못 특정하는 바람에 100년 넘게 정력을 소모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죠.(이 기사를 위해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와 권택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 박정재 춘추문화연구원 실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최태선, ‘불설장엄도량급공양구지료도법의 보구와 고고학적 매납사례’, <불지광조>, 정인스님 정년퇴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17
국립경주박물관, <경주공고 유구수습조사>(학술조사보고 23책), 2011
박홍국, ‘와전자료를 통한 영묘사지와 흥륜사지와 위치 비정’, <신라문화> 20호,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2
이근직, ‘신라 흥륜사 위치 관련 기사 검토’, <신라문화> 20호,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2
춘추문화연구원, ‘경주 흥륜사 서편(사정동 292-1번지 일원) 하수관로 설치공사 유적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자료, 2023
허형욱,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얼굴무늬수막새의 발견과 수증 경위’, <신라문물연구>8, 국립경주박물관, 2015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문기의 추석 선물’ ‘딸에게 보낸 동영상’···이재명 ‘선거법 위반’ 판결문
- 조국 “민주주의 논쟁에 허위 있을 수도···정치생명 끊을 일인가”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사라진 돌잔치 대신인가?…‘젠더리빌’ 파티 유행
- “민심의 법정서 이재명은 무죄”···민주당 연석회의 열고 비상행동 나서
- 40대부터 매일 160분 걷는 데 투자하면···수명은 얼마나 늘어날까?
- 드라마인가, 공연인가…안방의 눈과 귀 사로잡은 ‘정년이’
- 중학생 시절 축구부 후배 다치게 했다가···성인 돼 형사처벌
- 은반 위 울려퍼진 섬뜩한 “무궁화꽃이~”···‘오징어게임’ 피겨 연기로 그랑프리 쇼트 2위
- ‘신의 인플루언서’ MZ세대 최초의 성인···유해 일부 한국에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