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을 이제는 끝내기 위해 [여여한 독서]
권헌익 지음, 정소영 옮김
창비 펴냄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올해가 정전 7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한국전쟁 관련 책을 읽기로 했다. 이런 식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면 그 무겁고 무서운 역사에서 계속 눈을 돌릴 테니까. 여러 책 중 인류학자 권헌익이 쓴 〈전쟁과 가족〉을 골랐다. 박완서의 소설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보고 쉬 읽겠지 했는데 웬걸, 300쪽을 읽는 데에 일주일이 걸렸다. 문학·역사학·철학·정치학·인류학 등을 넘나드는 저자의 너른 지식이 버겁기도 했고 무엇보다 소설·영화·일기·문집·증언 등 다양한 자료로 전하는 전쟁의 경험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책을 덮을 순 없었다. 지난 세기의 경험이 바로 지금 여기 나의 일임을 알았으니, 덮는다고 덮어질까.
저자가 지적하듯이 세계는 일찌감치 탈냉전 시대로 들어섰으나 한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사람들의 일상과 정치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적대적인 남북·북미 관계, 상시적인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다. 냉전이라는 양극화된 정치 질서가 사람들의 관계와 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권헌익은 이 사실을 친족이라는 오래된 공동체를 통해 드러낸다. 근대의 주체는 개인인데 왜 친족 공동체인가? 그에 따르면, 가족·친족 같은 ‘관계’가 한국전쟁이라는 ‘전 지구적 내전’의 주요 타깃이고 경험 주체여서다.
알다시피 근대 정치사상은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사회를 나누고, 개인에 근거한 사회를 ‘정치적인 것’의 주체로 상정한다. 혈연·지연 같은 전근대적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은 근대성의 지표요 역사적 진보로 여겨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서구 사회철학의 전통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삶의 문제에서 공동체를 사회와 대비되는 존재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현대인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존재로 삶을 영위”하며, “공동체가 근대성의 공간에서 정치적 수명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집단책임과 연좌제가 전쟁 이후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지속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권헌익은 한국전쟁이 통일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둘러싼 내전이자 전 지구적 갈등의 일부이며, 21세기 패권국가인 미국과 중국 간의 국제분쟁이었고 무엇보다 “사회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역사학자 박찬승이 “마을로 간 전쟁”이라 표현했듯이, 한국전쟁은 지역·혈연 공동체 같은 친밀한 인간관계에 기초한 ‘소시에타스’를 주된 대상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그 결과 무려 200만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가 생겨났다. 모든 전투원 사망자를 합한 것보다 많은 이 숫자는, 전쟁 특히 내전의 폭력은 친족과 같은 ‘관계적 자아’를 겨냥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20세기 그 어느 전쟁보다 높은 민간인 희생자 비율은 한국전쟁의 무차별적 살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처음부터 사회적 관계망이 공격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박완서의 소설, 김성칠의 일기 등은 이로 인한 지옥 같은 현실을 증언한다. 남북의 공방 속에서 사람들은 선택을 강요당하고 사상을 의심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한 일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족이 했거나 했으리라 의심되는 일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도처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고 죽음의 진상은 침묵 속에 은폐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연좌제라는 전근대적 관행이 있었다.
국가가 허락한 애도
‘함께 앉은 친족’이란 뜻의 ‘연좌’는 죄인과 그 식솔이 함께 형벌을 받는 봉건시대 법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전근대적 제도가 전시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 사회에서 계속 유지된 이유는 뭘까? 가장 흔한 대답은 한국 사회의 후진성, 봉건의 잔재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저자에 따르면, 연좌제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탈식민지 국가에도,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와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미국에도 존재했다. 이는 “연좌제가 근대 정치와 그 위기라는 조건에서 효과적인 사회통제 도구”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냉전 시대에 국가는 근대법을 무시한 채 개인에게 “관계로 인한 죄”를 물었다. 그리고 관계망에서 걸러진 이들에게만 국민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 사회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당연한 윤리조차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무고한 양민, 순수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했다. 국가법과 자연법이 충돌하는 〈안티고네〉의 비극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이었으나 현대 한반도에선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 비극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저자는 사회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상처 입은 공동체가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대면하고 스스로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책에는 제주, 나주, 전남 구림마을, 안동 등,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사례가 여럿 등장한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건 제주에서 이루어진 4·3 추모작업이다. 한국전쟁이 “세계 내전의 대표적 사건”이라면, 4·3은 “한국전쟁의 서막”이라 할 것이다. 저자는 가장 먼저 냉전의 폭력을 겪은 제주가 가장 먼저 이를 증언함으로써 “사회적 평화라는 이상을 발현”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더욱 놀라운 건 아래로부터의 소박한 실천을 통해 이루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4·3의 와중에서 쪼개졌던 애월 하귀리의 경우, 반목해온 마을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는 작은 실천으로부터 통합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세워진 마을 위령비에서 권헌익은 “친족 세계와 정치적 세계의 소통”을, 평화의 시작을 본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하귀마을 4·3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리 산 자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때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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