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 처벌법 개정안에 ‘그 조항’이 생겨난 이유 [테크 너머]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PC용 메신저에 접속해 보니 쪽지가 도착해 있었다. 무심결에 열어봤다가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수년 전에 나를 스토킹했던 남자가 보낸 쪽지였다. 나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여러 차례 핸드폰 번호와 메신저 아이디를 바꿨다. 그러나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는 바뀐 핸드폰 번호도, 새로 가입한 메신저 아이디도 귀신같이 찾아냈다. 쪽지를 받고 난 이후 수개월간 다시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당시에는 그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단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별것 아닌 메시지에 과민 반응하는 거라며 나의 처신을 탓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온라인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온라인에서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됐다. 온라인에서 이미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에서의 위협으로 이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신고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종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2021년 (발의된 지 무려 22년 만에)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제정되었고, 6월21일에는 스토킹 범죄 처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안은 기존 법안에서 독소조항이나 다름없던 반의사 불벌 조항을 폐지하고, 개인정보를 게시하는 등의 온라인 스토킹 행위도 신고와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반의사 불벌’이란 쉽게 말해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얼핏 문제 없어 보이는 내용이지만, 사실 이 조항 때문에 많은 여성이 죽었다. 지난해 9월 서울 신당역에서 일어난 역무원 살인사건도 이와 관련이 있다. 가해자가 기존 스토킹 범죄에 대해 처벌하지 않도록 합의해달라며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는 등 더한 스토킹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가장 우선적이어야 하는데, 이 조항 때문에 도리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더 접촉을 원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 스토킹의 범위도 더 확대됐다. 이전에도 온라인 스토킹이 법안에 규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범위가 좁았다. 우편이나 전화, 팩스나 정보통신망 등을 통해 피해자에게 직접 메시지, 사진 등을 보내는 행위만이 스토킹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온라인 스토킹의 범위가 확대되어, 피해자에게 직접 도달한 게 아니더라도 피해자의 개인정보나 위치정보 등을 제3자에게 제공하고 배포·게시하는 것, 온라인상에서 피해자임을 사칭하는 행위 등이 모두 온라인 스토킹의 유형으로, 신고와 처벌이 가능하게 됐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만 보면 ‘이런 조항이 왜 필요하지’ 하고 의아할 수 있다. 피해자의 개인정보나 위치정보를 누가 왜 제3자에게 제공한단 말인가? 게다가 피해자를 사칭한다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런 조항이 생겨난 건, 슬프게도 그 뒤에 피해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것도 법제화될 정도로, 아주 많은 일이.
피해자 신상으로 돈 버는 인터넷 방송
이전에 십대여성인권센터에서 하는 모니터링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 모니터링 대상은 개인 방송 플랫폼이었다. 그 말에 아프리카TV나 트위치에 접속하는 줄만 알았는데, 활동가가 건네준 건 처음 보는 URL이었다. 이런 개인 방송 서비스도 있구나, 신기하게 둘러보고 있는데 이상한 형태의 방송 화면들이 눈에 띄었다. 플랫폼 메인에는 방송의 섬네일들이 떠 있었는데, 거기에 한 여성의 증명사진이 상단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진을 화면에 아예 걸어두고 남성 BJ가 청취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송에 들어가 보니 그 남성은 사진 속 여성의 신상을 ‘팔고’ 있었다. 그야말로 경악할 일이었다.
남성 BJ는 여성에 대한 음담패설을 쏟아내느라 바빴다. 사진과 함께 화면 상단에 고정된 공지에는 금액에 따라 여성의 개인정보를 어느 정도까지 줄 수 있는지가 빼곡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1만원을 내면 인스타그램 계정을, 10만원을 내면 핸드폰 번호를, 20만원을 내면 집 주소를 알려준다는 식이었다. 물론 그 BJ가 판매한다는 여성의 개인정보가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 방송은 그 자체로 심각한 수준의 가해였고, 나아가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인 게 분명했다. “저 여성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어도 너무 괴롭겠지만….” 내가 입을 떼자, 활동가가 대답했다. “모를 가능성이 크죠. 안다고 해도 제대로 처벌할 방법도 마땅치 않고요. 민사, 그러니까 명예훼손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커요.” 남성 BJ는 혹여나 오디오가 빌까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지만, 우리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한때 모두를 충격에 빠지게 한 ‘N번방’ 사건 가해자들도 피해자의 신상을 내걸었다. 사진과 영상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실제 거주지와 연락처를 약점으로 쥐고 흔들면서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들이 피해자의 신상을 얻는 방법은 아주 교묘했다. 학생에게는 학교에서 나눠주는 가정통신문을 촬영해 보내달라고 했고, 성인에게는 고용하겠다며 아르바이트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누구든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런 행위 모두가 개정된 스토킹 처벌법으로 인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법이 개정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바뀌었다. 그러나 여태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범죄를 유발하는 듯한 개인 방송은 플랫폼 차원에서 사전에 차단해야 하는데, 유명한 플랫폼이 아닌 서비스들은 도리어 그런 방송을 통해 돈을 벌었다. 메신저들이 다른 사람의 프로필 사진을 마음대로 캡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캡처하여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도, 여전히 서비스는 개선되지 않았다. 카카오웹툰 등 저작권 침해가 우려되는 앱 서비스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캡처를 방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카오톡만은 여전히 그대로다.
법이 개선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법이 바뀔 만큼이나 쌓인 피해 사례들은 하나하나 너무 슬프고 괴롭다. 죄 없는 이들이 다치기 전에 법이, IT 서비스가, 세상이 먼저 바뀔 수는 없을까? 선제적인 변화라는 건 불가능한 걸까. 스토킹 처벌법 개정 소식을 들으며 정말 기뻤지만, 동시에 슬프고 괴로웠다. 이제라도 바뀐 개정안을 환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을 한 명 한 명 추모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조경숙 (테크-페미 활동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