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300만 원 벌겠다고 5수(修)까지… 나이 들어도 가슴 뛰는 일을 찾으세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전국 교육기관서 3000여 명 활약
6070세대 문화참여 열망 살리려
‘이야기 예술인’으로 도약 시도
“초롱초롱 아이들 눈에서 힘 얻어
나이 불문, 우리도 문화 창작자”
‘이야기 할머니’를 아시는지?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하여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 56세 이상 여성 시니어 자원봉사자를 말한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매년 초 서류, 면접전형을 통해 선발된 뒤 6, 7개월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15년간 평균 경쟁률 4.9대 1, 올해는 6.7대 1을 기록했다. 재수, 3수는 기본이고 5수 끝에 합격한 분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할머니들은 5-7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적 정서를 담은 선현들의 이야기를 외워서 구연(口演)한다.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옛날얘기를 속삭이던 ‘무릎교육’의 전통을 살리면서 세대간 정서적 소통을 도모한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협력해 노령 여성인력 일자리 창출과 사회참여를 통한 문화복지를 위해 시작했다. 첫해 안동에서 30명을 선발한 이래, 점차 늘어 현재 전국 8617곳 유아교육기관에서 3162명이 활동 중이다.
이야기할머니 입장에서 보자면 주 2-3회, 연간 85회 수업에 활동비는 1년 320만 원 수준. 자원봉사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한번 이야기할머니가 되면 대부분 최장 10년까지 일을 계속하려 애쓴다. 새로 이야기할머니가 되려는 이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다.
이들은 왜 이야기할머니에 열광할까. 최근 열린 동화구연 배틀에 참여중인 이야기할머니 5명을 11일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 만났다.
‘약속시간 엄수!’ “항상 미리 가서 기다린다”
이 분들, 시간개념이 철저하다. 오후 3시 약속이었는데 2시 15분경 전화벨이 울린다. 할머니 세분이 로비에 와 있는데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다는 얘기였다.
이중 두 분은 각기 구미, 창원에서 기차타고 올라온 분들이다. “세상사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여유있게 움직인다”고 한다.
부랴부랴 인터뷰 장소까지 안내하는 사이 또 한 분. 10분 전에 도착한 마지막 할머니는 지각이라도 한 듯 미안해했다.
아무리봐도 이분들에게 ‘할머니’란 호칭은 위화감이 좀 느껴진다. 하지만 “5-7세 아이들 눈에는 할머니가 맞다”는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간다.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빛, 이야기에 집중하다가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 소리에 할머니들은 세상 시름 다 잊는다고 한다.
오세신 씨는 “가끔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요즘처럼 아이가 귀한 세상에 주 3일이나 많은 꿈나무들을 만날 수 있으니 특혜죠. 친할머니 외할머니들도 손주가 보고 싶으실 텐데, 그걸 빼앗는 것 같아 살짝 미안함도 느낍니다.”
이야기할머니의 집에는 항상 이야기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와 남편도 내용을 외울 정도. 20분간 구연할 내용을 완벽하게 외워야 하니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자랑한다.
도전정신이 할머니를 강하게 한다
이 분들과 얘기하다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모두 도전정신이 강하다. 할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다. 노력을 통해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고 다음단계로 나아갔다.
오세신 씨는 50대에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어린이집 운영을 그만둔 뒤 짧은 공인중개사 생활을 거쳐 연극을 배우고 시낭송대회에서 대상까지 탔다.
방영희 씨는 성가정입양원, 시립요양원에서 오랜 기간 자원봉사하는 한편으로 민요와 시낭송 판소리를 배우고 시니어모델 활동도 했다.
홍영란 씨는 성우활동을 그만둔 뒤 남편 사업을 돕는 한편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녹음 등 끊임없이 봉사활동을 벌였다.
백동자 씨는 60대에 접어들어 목욕봉사가 힘에 부치자 도서관에 나가 동화구연을 배우다가 이야기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다.
이예훈 씨는 색소폰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찾아간 강습장에 여자는 자기 혼자였지만 ‘지금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에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
둘째, 가족 우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자유로워진 경우가 많다. 지금 60대 이상인 세대만 해도 부인의 바깥활동에 거부감을 가진 집이 많았던 탓이다. 이날 만난 5명중 3명이 남편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고 했다. 예컨대 오 씨와 방 씨는 연극을 하고 싶어했지만 ‘집안 망한다’는 남편의 반대에 부딪힌 사연이 있다.
이 대목에서 화제는 요즘 사회문제인 저출산으로 옮아갔다. 가만 보면 지금 한창 결혼 안 하고 아이 안 낳는 세대가 바로 엄마들의 이런 삶을 보고 자란 세대 아닌가.
“‘여자는 결혼하면 손해’라거나 아이 낳아서 내 인생없이 사는 거 싫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지요. 그러니 더더욱 저희 세대가 삶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방영희)
“나이 들어도 꿈은 많아”
셋째 자신의 꿈에 솔직하다.
친언니가 이야기할머니 하는 모습이 좋아보여 도전했다는 이예훈 씨는 “K전통문화 콘텐츠를 해외에 알리는데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올해를 끝으로 만 8년간의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정리할 생각이라는 백동자 씨는 “수업에는 반드시 한복을 입고 갔는데, 한복차림이 잘 어울린다는 칭잔을 참 많이 들었다”며 “한복모델은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새 포부를 밝혔다.
역시 올해가 마지막해인 오세신 씨는 “우선은 이야기할머니에 재도전하는 길을 찾아보겠다”며 이 일을 놓지 못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만약 더 연장할 수 없다면 도서관에서 ‘책읽어 주는 할머니’에 도전해보겠다”고 한다. 봉사도 여행도 연극도, 걸어다닐 힘이 있을 때까지는 도전하고 싶다고.
‘이야기 할머니’에서 ‘이야기 예술인’으로
이런 이야기할머니의 세계에 올들어 변화가 일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구연동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오늘도 주인공’이 개최된 것.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 할머니들이 기량을 맘껏 뽐낼 수 있도록 한국국학진흥원, CJ ENM과 손잡고 만든 무대다.
참여자들은 4명씩 4개의 팀을 이루어 연예인 팀장과 함께 구연극 경연을 펼쳤다. 예능적 성격이 가미되다보니 6070세대 내에서 스타를 찾아내는 작업인 것으로도 보였다.
배경에는 고령화시대에 6070세대의 문화참여 열망을 살려 이들이 예술창작활동의 주역으로 활약하도록 지원한다는 취지가 담겼다. 특히 전통이야기 구연을 K전통문화 콘텐츠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그래서 문체부와 국학진흥원은 올해부터 아예 ‘이야기할머니’를 ‘6070 이야기 예술인’으로 바꿔 부르고 있기도 하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6070 예술인들을 응원하며 창작지원을 확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8일 방송될 최종 공연이 끝나면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극을 각색해 10월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10여차례 공연할 예정이다. 하반기부터는 이야기할머니들의 구연 영상에 외국어 자막을 입혀 해외에 전파한다는 계획도 마련돼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8월부터 이야기할머니를 파견하는 범위를 현재의 유치원·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돌봄 서비스인 ‘늘봄학교’로 넓힐 예정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이분들에게 혹시 행복하지 않은 동년배 여성분들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할지 물어봤다.
“나이가 들어도 가슴 뛰는 일을 계속 찾아야 해요. 저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방영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자원봉사 중인데 동료 봉사자 대부분이 75세 이상이세요. 이 분들, 늘 책을 들고 다니면서 역사 공부를 즐기세요. 이런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이예훈)
“몇살이건 꿈을 갖고 실천에 옮겨야 해요. 아무리 권해도 자신 없다던 후배가 내년에는 이야기할머니에 도전하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철저 지도해주기로 했어요.”(오세신)
“간절함과 열의로 무언가에 도전하는 경험은 꼭 해보셨으면 해요.”(홍영란)
동화구연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인 홍 씨지만 2014년 이야기할머니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털어놓은 경험담이 많은 이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제가 방송국 들어갈 때 500대 1 경쟁률도 뚫었는데, 이야기할머니 선발 경쟁이 훨씬 어렵더라구요. 동화구연은 제가 생각해도 잘 했고 심사위원도 감탄하셨어요.
그런데 제게는 간절함이 부족했어요. 옆의 분이 굉장히 간절하게 자기가 꼭 되고 싶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열의가 너무 대단하더라구요. 저는 ‘간절하신 분이 하셔야죠’ 이러고 말았다니까요. 마음속에 품은 간절함은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해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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