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일 안하겠다" 실업급여 신청한 남성의 최후[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2023. 7. 16. 05:5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웃기는 노릇 아니오? 나한테 돌아오는 건 수치심 뿐이잖소. 그냥 내 이름은 (복지 수당) 명단에서 빼 주시오. 이제 그만하리다. 나도 할만큼 했소"

영국에서 목수로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아내와 사별하고 가족 하나 없는 중년 남성인 그는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그만뒀습니다. 그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질병수당을 신청했지만 평가 항목에서 3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당 대상에서 탈락됐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실업급여라도 신청하는 블레이크. 그런데 신청 절차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모든 절차가 디지털화됐는데 마우스 스크롤조차 할 줄 모르는 컴맹인 블레이크에겐 어려웠던 거죠. 겨우 겨우 주변의 도움으로 실업급여를 신청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구직활동 증거를 내야 했습니다. 블레이크는 종이에 이력서를 작성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정부 시스템이 원하는 구직활동 수령증이나 핸드폰 사진이 없다는 이유에서죠.

블레이크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입니다. 주치의가 일을 해선 안된다고 해서 질병 수당을 신청했는데 이는 3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됐고, 실업급여 받으려고 구직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보조금도 끊길 처지에 놓인 거죠. 도움 얻을 가족 하나 없는 블레이크에겐 정부 수당이 너무나도 절실한데, 까다로운 관료주의는 그를 '돈을 타내려는 구걸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복지 제도 앞에서 인간적인 수치심을 느끼는 블레이크, 그는 친해진 공무원에게 이렇게 말하고 떠납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오."

이는 지난 2016년 켄 로치 감독이 내놓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실업급여, 조롱 대상 아닌 유일한 '동아줄'

최근 사회가 실업급여를 두고 시끄럽습니다. 정부가 실업급여의 하한액을 낮추거나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죠. 실업급여액이 최저임금 근로자의 세후 월 소득보다 많다는 점과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하는 반복 수급자가 많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실업급여의 취지는 간단합니다. 실직 근로자의 재취업 기간 동안 생활 안정과 구직 활동을 돕는 제도로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 해당하죠.

누군가가 이러한 선한 제도를 악용하거나 부정 수급한다면 이들에 대해 엄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업급여 제도의 악용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제도를 개편하는 것 역시 정부의 할 일입니다.

그러나 부정 수급자나 반복 수급자가 일부 있다는 이유로 실업급여를 단순히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실업급여 제도를 취지에 맞게 활용하는 선한 수급자들도 있기 때문이죠. 실업급여는 누군가에겐 단 하나 남은 동아줄이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일 수 있습니다. 기사를 쓰는 저나, 이 기사를 읽는 당신도 언제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 실업급여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업급여를 두고 '시럽급여'라고 조롱하거나, 남성과 여성 수급자를 갈라치기하거나, 수급자를 싸잡아서 부정 수급자로 일반화하는 것 역시 지양해야 할 행동입니다. 누군가에겐 실업급여가 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최후의 수단일 수 있습니다.

"개가 아니라 인간…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블레이크는 질병 수당 탈락 결정에 항고합니다. 항고 재판이 열리던 날, 블레이크는 재판장에서 할 이야기를 미리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재판이 열리기 직전 심장병 악화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은 본인 장례식의 추모사가 됩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신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이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rene@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