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그림 책 ‘비’···철학을 담은 시 같은 문장 눈길[화제의 책]

엄민용 기자 2023. 7. 1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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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표지



연일 비 소식이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다. 하지만 비만큼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없다.

비는 햇빛, 바람, 흙 등과 함께 지구를 지구답게 만드는 대표적 아날로그 물질이다. 지구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는 지구의 혈액을 순환시켜 왔다. 어느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비가 내린다.

비는 단순한 ‘물방울의 낙하’가 아니다. 어린 나무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빗방울에는 막대한 생명의 정보가 담겨 있고, 이제 막 우화한 나비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는 날카로운 죽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림책 ‘비’(노정균 지음 / 신진호 그림·만화 / 내일날씨)는 아날로그의 상징 같은 비가 디지털 정보를 품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책에서 ‘비는 직선이 아니라 점선’이라고 말한다. 점선의 공백을 ‘0’으로, 한 줄기 비를 ‘1’로 보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비가 이진법의 수열이 된다. 그렇게 비는 아날로그의 헌옷을 벗고 디지털의 새옷을 입는다.

‘비’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다. 작가는 그림책이 어린이만을 위한 도서 장르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비’에서도 어린이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 상징적인 짧은 문장 속에는 작가 특유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노라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든다.

특히 ‘비’는 그림 에세이 ‘모든 영광의 순간’을 출판한 신진호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작업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넘나드느라 다소 거칠게 보이는 텍스트가 그의 그림에 녹아들면서, 요즘 지긋지긋한 빗소리마저 매혹적인 멜로디처럼 들리게 만든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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