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군가 엿듣고 있다 [편집인의 원픽]

2023. 7. 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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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김대중정부 시절 청와대를 출입할 때 몇몇 수석들의 방은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커튼이 일종의 도감청 방지용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정찰위성으로 다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커튼을 친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북한은 정작 정찰위성을 한 기도 보유하고 있지않지만 한반도에는 24시간 군사 정찰위성이 돌고 있다. 미국이 가장 많은 정찰위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 많은 중국은 절반 이상을 한반도와 대만, 남중국해 감시에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1990년대말 이후 북 미사일 위협을 명분으로 정찰위성을 우주로 계속 쏘아 올렸다. 음성이 잡히지 않도록 방에 라디오를 틀어놓는 원시적인 방법도 사용되던 때였다.
지난 4월 미국 정보기관의 도감청 정보가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용산 대통령집무실에 대한 도감청 의혹이 제기됐다.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 정부에 대해 상시적인 도감청을 한 것 아니냐,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면서 보안 조치가 허술했던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대통령실은 보안에는 문제가 없으며, 유포된 정보도 사실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 상시 도감청 미비’(7월10일자·이현미·곽은산 기자) 기사는 그 이후 대통령실의 보안 실태와 더불어 정부의 도감청 사각지대를 다뤘다. 기사에서 지적된 대로 완벽에 가까운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재원 마련이 전제돼야 하지만, ‘정보 안보’에 대한 인식이 그 보다 중요하다. ‘이 정도면 됐다’거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하는 한 정보 도둑을 막을 길은 없다. 
용산 대통령실 전경
◆청와대 시절 보다 강화됐다지만

세계일보 기사에 따르면 현재 대통령실 도감청 방지 설비는 청와대 시절에 준해 도입됐다고 한다. 청와대 대통령의 집무 및 거주, 회의 공간 위주로 상시적인 도감청 대비가 이뤄졌던 것 처럼 용산 대통령실도 주요 직위자 및 회의실 등에 도감청 방지 설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업무 공간과 비서진 업무 공간이 분리됐던 청와대 시절에 비해 한 건물에서 대통령과 비서진의 업무 동선이 중첩되는 용산 대통령실의 보안 수위가 더 높다는 게 대통령실 입장이다.

경호처는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 과정에서 주요 직위자 및 회의실 등에 최적의 도감청 방지 장비를 갖추었고, 또한 용산 청사를 폭넓게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며 “이러한 도감청 방지 장비와 모니터링 시스템은 철저한 관리를 통해 설치·운용되고 있고 이는 청와대(시절)보다 월등한 성능의 신기술을 적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동선 중심으로 상시적인 도감청 방지 설비를 운용하고 나머지 공간은 휴대용 장비를 통한 모니터링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최신 도청 기술의 발달 수준을 감안하면 휴대용 장비를 통한 도감청 탐지 영역은 쉽게 뚫릴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업무 공간과 참모진들의 업무 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는 환경에서 보안 수준이 달라질 경우 ‘약한 고리’를 타깃 삼아 정보 탈취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도 이 같은 점을 의식해 청사 전역에 대한 상시 보호 시스템 구축을 검토하고 있지만 예산 확보가 걸림돌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16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전세계가 총성 없는 경제 전쟁, 정보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며 관계 부처에 대비를 지시했다. 대통령실 제공
◆“그걸 우리가 왜 해야하나”

최근 각 국의 정보전은 군사 안보에 관한 것 만큼이나 경제, 산업 분야에서도 각축전을 벌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서 “전 세계가 총성 없는 경제 전쟁, 정보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며 “우리 산업이 운용되는데 필수인 소부장, 에너지, 광물 등의 공급망 안보를 철저히 점검하고, 경제안보, 산업안보를 위해 공급망의 다변화와 필수 자원의 비축을 세심하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실제 이런 정보를 다루는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은 24시간 가동되는 고정형 도감청 탐지 설비를 구축하고 있다. 국방부와 군, 외교부, 국무총리실, 교육부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계일보 취재 결과 대북 정보를 다루는 통일부, 국가 세수입을 관장하는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밀입국·밀수 단속을 담당하는 해양경찰, 관료들의 직무를 감찰하는 감사원 등은 상시적인 도감청 방지 설비를 갖추지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북한의 해킹에 노출돼 논란이 일었던 선거관리위원회도 도감청 위협에 취약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 만큼이나 국가 주요 정보를 다루는 국회도 허술한 건 마찬가지다. 국회의장실과 부의장실, 일부 상임위원장실을 제외하고는 상시적인 도감청 방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대통령은 ‘총성 없는 경제 전쟁, 정보 전쟁’에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정작 현장에서는 “지금까지 사고가 없었는데 그걸 왜 대비해야하느냐”는 반응을 보인 공직자도 있었다고 한다. ‘정보 보안’에 대한 그 부처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세계일보 보도 이후 도감청 탐지장비를 확대 설치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부처도 있다. 밀입국·밀수 등을 담당하는 해양경찰은 “본청과 일선 지방청·경찰서 내 민감정보 취급 부서에 도감청을 원천 차단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P.S. 취재한 이현미 기자에 물었습니다. 
 
-대통령실과 정부의 도감청 대비 실태 기사를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보안관련전문가인 취재원으로부터 대통령실은 물론 주요 정부 부처의 도감청 대비 시스템이 크게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도청 장비는 중간에 정보를 가로챌 수 있을 정도로 진화해서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의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상시 도감청 장비가 없더라도 휴대용으로 탐지하면 되지않겠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휴대용 탐지는 사실상 도청 위험에 문을 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최근 도청 장비는 원격 조종이 가능한 온오프 기능이 있는데다 일정하게 지속되는 말소리가 들릴 때만 작동하는 등 은신 기능이 발달해 간헐적인 탐지로는 잡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상시적인 도감청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대통령실과 정부, 국회 실태를 알아보게 됐다.”
 
-도감청 실태 취재에 대한 대통령실 반응은 어땠나. 
 
“경호처는 청사 전역에 상시 대비가 되어있지않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지난 4월 미국 정보기관의 도감청 논란 이후 설비 확대를 추진해온 경호처로서는 상시 시스템 구축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와대 시절에서도 대통령 중심으로 도감청 대비가 이뤄졌는데 이것을 대통령실 전체 조직으로 확대하려면 예산 확보가 시급하다. 대통령실 차원의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해양경찰은 보도 직후 설비 보완 방침을 밝혔다. 다른 부처들 움직임은. 
 
“본지 보도 이후 내부적으로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실과 각 부처별로 구체적인 움직임은 현재 취재중인데 추가로 몇가지 확인되는대로 기사화할 예정이다.”
 
<관련기사>
 
[단독] 대통령실 ‘상시 도감청 방어’ 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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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상시장비 없인 완벽 방어 불가능… 靑 시절부터 보안 취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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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대북·마약·감찰 등 민감정보기관도… “예산 없어” 도감청 위험 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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