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평범한 회사원, 15만 팔로워 인플루언서가 되다[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정양환 기자 2023. 7. 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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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행 인플루언서 ‘도로시’ 김슬기 씨 (상)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지난해 5월 일본 오사카 하루카스300 전망대에서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는 여행 인플루언서 김슬기 씨.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여행 블로그를 시작한 그는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워 15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슬기 씨
“아주 맛있는 초콜릿 크림 파이나 기대하지 않은 거액의 수표를 받는 일을 제외하고, 상쾌한 봄날 저녁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해의 긴 그림자를 따라 외국 도시의 낯선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 산책’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누구나 서로 파장을 주고받는다. 허나 소셜미디어 시대에 ‘인플루언서(influencer)’는 이전과는 다른 관계의 지형도를 낳았다. 페이스북·유튜브 등으로 수익 창출이 가능해지며, 인플루언서는 그저 “영향력을 지닌 이”가 아니라 촉망받는 ‘직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즘 청소년 장래 희망 순위에서도 인플루언서는 매번 1, 2위를 다툰다.

물론 연예인 등 기존 유명인들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인플루언서다. 하지만 이젠 ‘보통 사람’도 세상을 잘 읽는 콘텐츠를 발굴하면 그들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닌다. ‘여행킬러도로시’로 활동하는 김슬기 씨(36)도 그들 중 하나. 2016년 즈음 본격 전업한 그는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워 15만 명을 보유했으며, 네이버 일일 방문자 수는 평균 만 명에 이른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어떻게 이런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었을까. 온라인 네트워크 세상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 김 씨를 만나봤다.

2019년 태국 푸껫에서 코끼리 목욕시키기 체험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 김슬기 씨
-유명 인플루언서지만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요.
“아이고, 인플루언서라 불리기엔 너무 거창하고요. 포털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서 여행 정보 제공하는 일을 하는 김슬기라고 합니다. 여행에 관심 있는 분들 중에 활동명 ‘도로시’로 알아보시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긴 해요. 요즘은 자유여행 준비하실 때 인터넷을 많이 참고하시잖아요. 제가 먼저 체험해보고 교통편 예약 방법 같은 실질적인 팁을 전달하는 거죠. 처음엔 해외여행 위주로 했는데, 팬데믹을 겪으면서 국내 여행도 다루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쭉 살고 있는 부산 토박이기도 해요.”

-어릴 때부터 여행 관련 직업을 꿈꿨나요.
“전혀 아니에요. 원래는 3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저도 좋아했지만 부모님도 음악을 좋아하셔서,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쯤 요즘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 거예요. 콩쿠르 나가도 잘해야 2, 3등 하는데 과연 내가 피아노로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 집이 그리 부자도 아니고 부모님이 어렵게 지원해주시는데 과연 내가 나중에 보답할 수 있을까. 실은 초6 때 이미 제 한계를 좀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관뒀어요.”

-부모님이 아쉬워하시지 않았나요.
“처음엔 장난인 줄 아셨대요. 힘드니까 잠깐 그러다 말겠지 싶으셨나 봐요. 사실 계속 피아노만 치다 보니 공부 성적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크게 내색은 하지 않으셨어요. 본인이 결국 돌아가겠지 생각하셨대요. 근데 제가 다시는 피아노 얘기도 꺼내지 않으니까 많이 놀라셨다더군요. 이런 얘기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셨어요. 피아노 관둔 게 아깝긴 했다, 이 정도로.”

201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에서. 사진제공 김슬기 씨
-자식의 판단을 믿어주시는 성향인가 봐요.
“네…, 저나 동생한텐 그러셨어요. 그게 아마 언니와의 갈등 때문이었을 거예요. 첫째 언니가 저랑 다섯 살 터울인데, 큰딸이라 기대가 크셨는지 많이 엄격하셨어요. 그 바람에 언니가 마음을 못 잡고 방황을 좀 심하게 했어요. 지금이야 결혼해서 잘 살지만, 말 그대로 당시엔 ‘질풍노도’였거든요. 부모님도 그걸 힘들게 겪으신 뒤로는 자식들 의견을 많이 들어주시려고 노력하셨어요.”

-피아노 관둔 뒤 대학은 식품공학과로 진학했어요.
“뭔가 동떨어진 느낌이죠? 근데 중학교 때부터 맘 잡고 공부하는데, 이상하게 수학이 재밌었어요. 고등학교 때 제가 수학 천재인 줄 알았다니까요. 미적분 들어가기 전까진, 하하. 하여튼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걸 보시더니, 아버지가 식품공학을 추천하셨어요. 사람은 의식주를 빼놓고는 살 수 없다면서요. 사실 고3 때 전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에 매료돼서 그쪽으로 전공할 방법을 찾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워낙 생소한 분야인지라 그냥 식품공학과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인제대 식품공학과로 가게 됐죠.”

-근데 졸업 뒤 첫 취업은 건설사로 했던데요.
“그러니까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물론 요즘 세상에 전공 살려서 취직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특히 제가 06학번인데 취업률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라,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대기업(롯데건설)에 사무직으로 취직했으니 뽑아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죠. 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셨고요. 부산에서 롯데, 아시죠? 어른들 생각이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딸내미가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다니까, 이젠 시집만 잘 가면 되겠다 싶으셨나 봐요.”

2018년 일본 쿄토에서 기모노 체험을 하며 찍은 사진. 사진제공 김슬기 씨
-그리 오래 다니진 않았던데 이유가 있나요.
“네, 1년 정도 다니다 관뒀어요. 제가 부족했던 거겠지만, 상황이 좋게 돌아가질 않았어요. 일단 당시 부산 쪽 아파트 경기가 나빠지면서 인원 감축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대놓고 얘기하진 않아도 뭔가 분위기가 흉흉해졌죠. 게다가…, 직원 상사 한 분과 관계가 너무 악화됐어요. 절 가르치려고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회사 가는 게 두려울 정도로 무서웠거든요.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릴 지경이어서, 결국 사표를 내게 됐어요.”

-집에선 뭐라 하시지 않으셨나요.
“웬걸요. 그 일로 태어나서 엄마한테 제일 크게 혼이 났어요.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그냥 퇴사한 뒤에 일방적으로 통보했거든요. 서운하기도 하셨고, 어른들 눈엔 사회생활 하며 그 정도 어려움은 다 겪는 건데 왜 못 참느냐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우리 딸 대기업 다닌다고 뿌듯해했는데 갑작스레 나와버리니 당황도 하셨겠죠. 게다가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회사를 그리 쉽게 관두시질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요즘 세대들과 다르긴 하죠.
“저도 그렇지만 제 주변 친구나 비슷한 나이대 선후배를 봐도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아예 없거든요. 사회생활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걸 참아가며 일하지 않죠.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고나 할까. 반면 저희가 다소 공정에 민감한 측면도 있죠. 윗세대와 달리 어릴 때부터 귀하게 예쁨 받으며 자란 세대잖아요. 그래서인지 억울한 일이 생기면 속으로 삭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슬기 씨가 지난해 3월 제주 협재해수욕장에서 찍은 사진. 김 씨는 “팬데믹은 여행 인플루언서에게 너무나 힘겨운 시기였지만, 국내로 여행을 다니며 우리나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가 됐다”고 전했다. 사진제공 김슬기 씨
-퇴사 한 달 만에 바로 재취업했다면서요.
“자꾸 운이라고 말씀드려서 죄송한데, 묘하게 잘 맞아떨어졌어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식품회사가 있었는데, 전공 덕분인지 비교적 쉽게 합격했어요. 저로선 연봉도 크게 차이 나질 않는 데다 전공을 살릴 수 있으니 나쁠 게 없었죠. 하지만 그 역시 그리 오래 가진 못했으니, 직장생활이 저랑 그리 잘 맞는 건 아닌가 봐요.”

-거긴 왜 관둔 건가요.
“음…,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한두 가지 이유만 있는 건 아니죠. 일단 중소기업 다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작은 회사는 자기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인원이 많지 않다 보니 2, 3명 이상의 몫을 해주길 바라죠. 저도 1년 반 정도 다녔는데, 전산세무 2급 자격증도 취득하고 HACCP(해썹) 팀장 교육도 이수해야 했어요. 해썹은 식품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위생관리 시스템 같은 거예요. 그 덕에 지금 세금 처리도 혼자 척척 할 줄 알게 됐지만, 뭔가 일에 치여서 삶의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행 블로거라는 프리랜서를 택한 겁니까.
“그걸 염두에 두고 직장을 관둔 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거예요. 사실 그때 사회생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인간관계나 이런저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이 지쳐있었거든요. 뭔가 다 비워져서 더 쏟아낼 에너지가 없는 기분? 다시 그걸 채우는 게 중요할 거 같아서, 스스로를 돌보는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 거죠. 그때 여행이 많은 위안이 됐어요.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말 행복하다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어요.”

2017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김슬기 씨가 찍은 김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 김 씨는 다른 어떤 사진보다도 이 사진을 꼭 게재하고 싶어 했다. 그는 “여행 인플루언서로 일하며 번 돈으로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닐 때가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사진제공 김슬기 씨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뭐였나요.
“이게 좀 부끄러운 얘긴데…,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죠?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많이 찾아보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온라인에 은근히 여행 관련 응모 이벤트가 많더라고요. 여행 후일담을 재밌게 올리면 숙박권이나 식당 이용권 같은 걸 주는 거죠. 와, 이런 거 받으면 가족이나 친구들하고 또 재밌게 여행 갈 수 있겠다는 단순한 호기심이 출발점이었어요. 근데 기왕 하는 김에 나도 블로그로 이런 걸 정리해서 올리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포털사이트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이 꽤 많고, 연예인이나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죠.”

-2016년부터 활동했는데 그때도 이미 도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요.
“맞아요. 포화상태란 말들이 나온 지 한참 된 시점이었죠. 저도 블로그 하겠다니까 주변에서 말리느라 장난 아니었어요. 전문적으로 글 쓰거나 사진 찍던 사람도 아니니 당연히 걱정하죠. 근데 아마 느끼셨겠지만, 제가 약간 그런 면이 있거든요. ‘그렇건 말건, 일단 내가 해보고 겪어봐야지’ 정신. 시도해야 뭐든 시작할 수 있고, 성공이건 실패건 결과도 있는 거잖아요.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고민만 한다고 이뤄지는 게 있나요. ‘막무가내’로 보이긴 하겠지만, 뭐든 저질러야 결과도 있는 거니까요.”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김슬기 씨가 보내준 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피아노 콩쿠르에 나갔던 모습이라고 합니다. 겨우 열 살 때인데도 사뭇 진지하게 집중한 표정과 자세가 눈길을 끄네요. 사진제공 김슬기 씨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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