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틀 후 광복군 청년영웅 3명 사살…광복군사업회 日 ‘살인’ 혐의 고소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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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1945년 8·15 광복 이틀 후에 한국광복군 청년 3명을 중국 현지에서 사살한 사실이 기록된 광복회 내부 사료가 발굴돼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이에따라 579명의 광복군 후손들로 구성된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회장 이형진)는 이 사료를 근거로 일본 정부를 살인 혐의로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광복군 소속 청년 3명이 광복 이후인 1945년 8월 17일 일본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내용은 '전우' 제3호 3쪽 '진고'란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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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순·김천성·김찬원…평북 출신 20∼30대, 1945년 8월17일 사살
일본이 1945년 8·15 광복 이틀 후에 한국광복군 청년 3명을 중국 현지에서 사살한 사실이 기록된 광복회 내부 사료가 발굴돼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이에따라 579명의 광복군 후손들로 구성된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회장 이형진)는 이 사료를 근거로 일본 정부를 살인 혐의로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광복군 단체가 광복군 활동과 관련해 일본 측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한·일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5일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은 일제강점기에 ‘전우’라는 제목의 소식지를 비정기적으로 제작해 배포했다. 30여쪽 분량의 소식지에는 광복군 활동과 관련한 소식 등이 담겼다.
광복군 소속 청년 3명이 광복 이후인 1945년 8월 17일 일본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내용은 ‘전우’ 제3호 3쪽 ‘진고’란에 실렸다. 진고에는 광복군 안팎에서 활동하는 ‘윗선’에 보고할 내용이 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우’ 제3호는 총 36쪽 분량으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부에서 발행했다. 발행일은 적시되지 않고 있지만 내용상 광복 이후로 추정된다.
글 말미에 광복군 청년 영웅의 성명과 고향이 순서대로 실렸다. ‘이해순(평북 출신) 이명(異名) 전일묵’, ‘김천성(평북 출신)’, ‘김찬원(평북 출신)’. 이해순씨는 광복군 활동 당시 전일묵이란 가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전우’ 제3호 3페이지에 실린 글에는 ‘대륙에 피 뿌린 광복군의 세 영웅’이란 제목 아래 영웅이라 칭송하는 3명의 광복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광복군의 세 영웅이 동지들의 애도 속에 무언의 개선(‘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복귀’)을 했다’고 실렸다. 그 뒤로 이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됐다.
‘재작년에 군의 중대한 임무를 띠어 특수공작원으로 적 지구에 파유(파견) 명령을 받은 그들은 태원 북경 방면에서 조국 광복의 끓는 열정을 품고 용감히 활동하던 중 작년 6월에 군과의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소식이 끊긴 이유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기 때문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달 동안 고문을 받고 일본 투항(8월 15일)한 다음다음 날에 귀자의 독검에 너머지고 말았다’는 내용이 실렸다. 여기서 ‘귀자’는 일본을 멸시하며 부르는 용어로 ‘일본의 독검(毒劍)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들의 순국을 두고 광복군은 결의를 다졌다는 내용도 실렸다.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세 광복군 영웅은 모두 20~30대 청년으로 후손이 없는 광복군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중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광복 활동을 벌이다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파악된다. 김천성 선생은 1943년 중국 산서성 태원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1945년 8월 17일 31세에 총살당했다. 김찬원 선생은 1945년 중국 태원지구에서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붙잡혀 같은 날 28세에 총살당했다. 이해순 선생은 중국 산서성 운성에 파견돼 공작 활동을 하던 중 붙잡혀 같은 날 26세에 총살당했다.
이형진 기념사업회장은 “8·15광복으로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음에도 총살을 한 건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없다”며 “역사적 사실만큼은 바로잡자는 취지로 일본 정부를 살인 혐의로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고소한 뒤 손해배상 청구의 소까지 제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아직도 무후(無後·후손이 없는) 광복군으로서 해방 전·후 전사 또는 작고하신 훈장을 서훈 하신 광복군들을 정부가 파악조차 못해 위패조차 모시지 못한 광복군이 40 분”이라며 “기념사업회에서 정부에 명단을 제출하고 서울과 대전의 무후선열 제단에 위패봉안을 요청했으나 아직도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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