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대저택 언덕에 몰린 이유···‘이 동물’ 피하기 위해서였어?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7. 1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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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30] 지구 역사상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은 무엇일까요. 밀림의 제왕 사자, 맹수 중의 맹수 호랑이, 아니면 서로 죽고 죽이는 우리 인간 자신일까요. 모두 정답이 아닙니다. 더 독한 존재가 우리 인류를 괴롭혀 왔기 때문입니다. “윙--” 소리 하나로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이 녀석. 바로 모기입니다.

1912년 애니메이션 ‘하우 어 모스키토 오퍼레이트’의 한 장면.
모기로 인한 연간 평균 72만명이 사망합니다. 인간에 의해 사망한 인간은 47만명(3위는 뱀, 4위는 개입니다). 압도적 1위가 모기인 셈이지요. 전염병을 옮기는 치명적인 존재여서입니다. 말라리아·뎅기열·황열병이 모기가 매개하는 주요 질병이었지요. 이 질병들에 대한 대비책이 거의 갖춰진 지금도 수 십만명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빌&멀리다 게이츠 재단은 20만 년 동안 살아 온 1080억 명의 인류 중 약 520억 명의 목숨을 모기가 앗아간 것으로 추정할 정도지요. 아프리카나 저개발 지역에서 모기는 여전히 치명적인 ‘살인무기’입니다.

1901년 수컷 모기 묘사도. <사진 출처=wellcome images>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 ‘모기’는 빠짐없이 등장했습니다. 문명의 전환기에서 이 녀석은 여지없이 나타나 역사의 항로를 결정지었지요. 역사는 피로 쓰인다지만, “역사의 절반은 모기침을 펜으로 삼아 쓰였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옵니다. 한증막 같은 공기, 갑자기 내리치는 빗줄기, 땀이 가시질 않는 여름, 모기의 역사를 사색합니다.
모기로 살고 모기로 죽은 ‘고대 로마’
모기로 흥하고, 모기로 망한 제국. 바로고대 로마였습니다. 로마 인근에 습지가 많았기에 모기가 살기 최적의 지역이었지요. ‘폰티노 습지’가 대표적입니다.

고대 로마의 한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대한 흡혈곤충 때가 늪지의 그림자 뒤에서 먹잇감에 골몰하는 짐승들처럼 기다리고 있다.” 과학자 로버트 살라레스는 자신의 저서 ‘말라리아와 로마’에서 “이탈리아 전역의 습지가 말라리아에 휩싸여 있다”고 썼습니다.

프랑스 화가 호레이스 버넷이 그린 폰티노 습지에서의 사냥. 로마로부터 수십 km 떨어진 이곳은 수도로 들어가는 데 핵심 관문이었다. 그만큼 모기떼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1833년 작품.
전염병은 고대 로마 시민을 괴롭혔지만, 때로는 ‘방패막이’ 역할도 해주었습니다. 전쟁의 신인 카르타고의 한니발 역시 로마를 한 번도 정복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지요.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후에도 그는 로마로 나가기를 꺼렸습니다. 길목에 자리한 ‘습지’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로 진격하는 데 있어서 ‘폰티노 습지’를 거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습지 안에는 ‘모기 부대’가 싱싱한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습지는 한니발을 승리 앞에서 뒤돌게 했지요.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진 로마가 전쟁에서는 승리하게 된 이유입니다.

독일의 예술가 하인리히 로이트만이 1866년 그린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한니발은 로마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로마를 점령하는 데는 주저했다.
로마의 군대를 무찌르고도 모기부대에 당한 인물은 한니발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390년 갈리아의 왕 브렌누스(Brennus) 역시 로마를 점령했지만, 이유 없이 쓰러지는 병사들을 하릴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에는 금화로 배상금을 받고 도시에서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의심의 여지 없이 ‘패잔병’의 몰골이었습니다. 세계적 영웅을 잇달아 물리친 로마의 전성기 뒤에는 모기부대의 조력이 있었던 셈입니다.

프랑스의 화가 폴 자민이 1893년 그린 브레누스와 그의 전리품. 그는 로마로부터 큰 승리를 거두고 약탈을 자행한 인물로 묘사된다.
“아프다고? 이게 다 공기 때문이네”
“습지 근처는 몸에 안 좋은 공기가 많습니다.”

물론 당대의 의학수준으로는 모기를 전염병의 원인으로 특정하진 못했습니다. 그저 습지 근처에만 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많이 아프다고 생각할 뿐이었지요. 당대 철학자들과 의학자들은 “나쁜 공기가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미아스마는 ‘독기 이론’이라고도 통한다. 나쁜 공기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믿음은 19세기 콜레라 창궐시기까지 이어졌다. 로버트 시모어의 1831년 삽화. 콜레라가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믿음을 그린 작품이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와 제자들이 설파한 ‘미아스마’ 이론입니다. 사람의 건강에 공기가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 말라리아라는 용어가 이탈리아어로 ‘나쁜(Mal) 공기(Aria)’라는 뜻인 이유입니다.

특히 모기가 왕성하게 번식하는 여름에는 전염병이 심하게 돌았습니다. 검투사들의 외과 의사였던 갈레노스는 “그 병은 우리 눈앞에 매일같이 나타난다. 특히 이곳 로마에서의 상황은 심각하다”고 적었지요. 시민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아람어 ‘아브라카다브라(말하는 대로 되리라)’가 적인 부적을 몸에 붙이곤 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열병의 여신 페브리스를 묘사한 1698년19세기 삽화. <저작권자=Jacobus Harrewyn>
미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도자들은 열병의 여신 페브리스(Febris)를 위한 사원을 짓고 “말라리아를 멈추어 달라”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부호들이 언덕위에 집은 지은 이유
부호들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취합니다. 고지대나 언덕 위로 피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늪지대의 공기가 닿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하면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언덕 위의 집’은 로마의 지배계층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했지요. 로마가 제국이 되고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서 ‘언덕선호현상’도 전 세계적으로 번졌습니다.
로마의 교황들은 오랜 기간 바티칸에 거주하는 것보다는 도시의 가장 높은 라테라노 궁전에서 살았다. 티모시 와인가드는 이를 말라리아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독일화가 루돌프 비그만이 1834년 그린 로마 전경.
‘모기’를 쓴 티모시 C. 와인가드는 “오늘날 미국에서 언덕 꼭대기의 저택이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건 모두 고대 로마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단언했지요.

우리나라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할 때, 로마 사람들은 “마마야, 파파야, 언덕살자”했던 것입니다. 부동산 업계의 ‘모기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가 ‘배산임수’에서 보듯 물가나 늪지를 피하지 않은 이유는 국내 토착 말라리아가 치명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부촌인 베벌리 힐스. 이름에서 알다시피 언덕에 인접했다. 미국 부촌에는 힐즈가 들어간 언덕 지역이 많다.
몽골은 왜 승리를 앞두고 말머리를 돌렸나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 무르익던 시기였습니다. 1220년 몽골이 무시무시한 제국을 일구면서였습니다. 영향력으로 따지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한반도에서부터 유럽 문명과 닿아있는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일구었지요. 이토록 큰 제국이 자리를 잡았던 적은 인류 역사상 없었지요. 세계의 군주라는 뜻의 ‘칭기즈칸’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적 대국을 일군 칭기즈칸.
이제 몽골 제국은 유럽을 탐합니다. 세계와 세계를 잇는 대위업을 위해서였지요. 칭기즈칸의 후계자 오고타이의 몽골군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헝가리를 짓밟았습니다. 1241년 크리스마스에는 헝가리 페스트 지역과 다뉴브 강까지 밀고 들어갔지요.

팍스 몽골리카(몽골에 의한 지배)의 시대. 3만의 기마병이 동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 뒤에는 초토만이 남아있었지요. 그들이 지나간 도시의 80%는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팔린 것으로 전해질 정도입니다.

폴란드 대공의 머리를 전시한 뒤 진격하고 있는 몽골군.
그런데, 몽골군이 서진하던 1242년. 그들이 갑자기 말 머리를 돌립니다. 고향 동쪽으로였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이들은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런 배경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기에 궁금증은 더해졌지요. 역사를 공부하던 윈스턴 처칠이 이를 두고 “신의 뜻으로 몽골군이 수도 카라코룸으로 돌아갔다”고 했을 정도였지요.

이들의 행보에 대한 해석에 모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퇴각 한 해 전인 1241년 날씨가 원인이었습니다. 봄과 여름 이상하리만치 습하고 강수량이 많았던 것이었지요. 건조하고 광활한 동부 유럽의 마자르 초원은 몽골군이 달리기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 해만큼은 예외였지요.

축축한 늪지가 곳곳에 생기면서 모기가 급증했던 것입니다. 모기들에게 몽골인들의 정맥은 너무나 맛있는 식사감이었지요. 와인가드는 “유럽 정복에 대한 몽골인의 꿈은 모기에 의해 막을 내렸다”고 정의합니다.

1258년 바그다드를 포위한 몽골군.
몽골군의 주력인 말과 활도 습지에서 무력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말은 진창에 빠지기 일쑤였고, 초지가 늪으로 변하면서 먹이도 찾기 힘들게 됐기 때문입니다. 습도가 이례적으로 높아 팽팽하던 활시위도 늘어졌지요. 몽골군에겐 최악의 환경이었던 셈입니다.

역사학자 존 키건은 “몽골군의 흉포함은 강우량이 높은서유럽에서는 발휘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241년의 날씨가 화창했다면, 아시아인들이 지구의 지배자로 떠올랐을까요.

말라리아 치료제의 발견...그러나 어떤 이는 죽음을 택했다
모기가 불러온 말라리아는 계속해서 인류를 괴롭혀 왔습니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던 탓에 영국에서는 ‘커피’를 특효약으로 여기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인류의 지식은 시나브로 쌓여 갔습니다. 그리고 진짜 치료제를 발견하지요. ‘퀴닌’이라는 물질이었습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은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발견됐다. 사진은 예수회 소속 일본에 선교를 간 프랜시스 자비에르.
17세기 중반 스페인령 페루의 친촌이라는 지역에서 한 백작 부인이 말라리아 열병에서 기적같이 회복한 것이었지요. 예수회 선교사가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껍질을 먹인 직후였습니다. 이 약은 ‘백작부인의 가루’ 혹은 ‘예수회 가루’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지요. 말라리아로 오랜 기간 고생한 유럽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그 가톨릭의 약물은 먹지 않겠네.”

의학의 후광이 전 인류에게 뻗친 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이유로 퀴닌을 단호히 거부한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실한 개신교인 영국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이야기입니다.

찰스 1세를 단두대에 올린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지요. ‘퀴닌’이라는 명백한 치료제가 있었음에도 그는 치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퀴닌을 발견한 예수회 선교사가 가톨릭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이렇게 주장했지요. “나는 ‘예수회의 분말’로 인한 독살을 원치 않는다.”

영국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말라리아 치료제를 가톨릭의 산물이라며 섭취를 거부했다.
개신교의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이교도의 치료법을 쓸 수 없다는 외침. 그는 결국 신의 품으로 가게 됩니다. 호국경의 죽음으로 영국은 다시 왕정사회로 나아가게 됐지요. 만약 퀴닌을 발견한 이들이 개신교도였다면, 영국의 왕정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셈입니다.

19세기 종교적 색채가 많이 희석되어서야 영국 정부도 퀴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지요. 인도를 식민지 삼던 시절에는 퀴닌을 섞은 음료를 군인들에게 배급하기도 했었습니다. ‘토닉 워터’가 바로 그것이지요.

술자리에서 자주 음용되는 토닉 워터의 시작은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이었다. <사진 제공=하이트진로>
노예에 자유를 불러온 ‘퀴닌’
퀴닌은 미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약으로 꼽힙니다. 노예해방을 두고 맞붙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였기 때문이지요. 링컨의 북부연방은 전쟁 동안 19t의 정제된 퀴닌과 10t의 비정제 키나나무 껍질을 배급합니다.
퀴닌의 원료식물인 기나의 19세기 삽화.
반면 남부맹방은 퀴닌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북부 주들이 해상봉쇄로 남부에 퀴닌이 배급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남부맹방이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말라리아에 시달렸다는 의미였지요.

남부지방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지만, 퀴닌을 구할 방법은 거의 없었습니다. 구한다고 하더라도 터무니없는 가격이 매겨졌지요. 전쟁이 시작되던 해 1861년 퀴닌 가격은 28g(1온스)당 평균 4달러였으나, 해상봉쇄가 본격화하자 그 가격은 400달러로 뛰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연합이 남부의 무역을 봉쇄하려는 내용을 담은 삽화. 스콧 장군의 ‘아나콘다 계획’이라고도 불린다.
남부맹방군은 이제 북부연합군과 더불어 모기와의 싸움도 시작해야 했던 셈입니다. 한 영국인 종군기자는 “질척한 늪지대에서 나오는 음울한 오물이 총보다 더 위협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결국 승리는 링컨에게로 돌아가지요. 현재 미국의 기틀을 다진 역사적 순간에도 모기는 주연 역할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남북 전쟁 당시 벌어진 햄프턴 로드 전투 그림. 커츠 & 앨리슨의 1889년 작품. 미국의회도서관 소장품.
인류의 역사에 수시로 일침을 놓은 모기
우리 인간은 ‘신을 넘어선 존재’로 자신을 묘사하곤 합니다. 자연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아주 작은 존재에 무릎을 꿇곤 했습니다.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모기가 그랬고, 2020년 불현히 우리를 덮친 코로나19가 그랬습니다. 아직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입니다. ‘윙-’ 소리로 많은 인류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을 봐도 그렇습니다.

프랑스 화가 어니스트 에베르가 그린 ‘말라리아’(1849년).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소작농들이 폰티노 습지를 떠나는 모습을 그렸다.
<네줄요약>

ㅇ모기는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이다. 지구를 살다 간 1080억명의 인간 중 520억명이 모기 매개 질병에 의해 사망했다.

ㅇ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모기가 영향을 끼쳤다. 로마제국 역시 모기가 만든 말라리아로 적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ㅇ몽골군의 유럽 정복이나,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모기 매개 질병이 끼친 영향이 컸다.

ㅇ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작은 벌레 앞에서 오랜 세월 무력했다. 겸손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ㅇ티모시 C. 와인가드, 모기, 커넥팅, 2019년.

ㅇ앙드레 모로아, 미국사, 김영사, 2015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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