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체력 부족한 ‘코끼리 인도’…멀어지는 ‘반도체 드림’
폭스콘 때문에 인도가 시끌벅적했다. 발단은 대만 반도체 칩 제조회사 폭스콘이 인도의 베단타와 조인트벤처 사업을 하기로 했다가 “안 하겠다”며 지난 10일 뒤집어엎은 것이다. ‘아이폰 만드는 회사’로 유명한 대만의 폭스콘은 지난해 인도에 칩을 생산하는 합작 공장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업규모가 195억달러에 이르는 프로젝트였다.
물 건너간 이유는 베단타 쪽과 협상이 원활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합작회사의 기술파트너로 유럽의 칩 제조업체 에스티(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확정하려던 과정에서 이견이 있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베단타는 전자제품과는 관련 없는 광업회사인데 최근 빚이 늘어서 폭스콘이 못 미더워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튿날 폭스콘은 “최적의 파트너를 찾고 있다”고 발표했다. 새 협력 상대를 찾아내 인도 정부가 지원하는 생산연계인센티브(PLI)를 다시 신청할 것이라고 했다. 폭스콘은 “인도 투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이 사달이 나면서 인도의 성장 가능성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고급인력 많은 ‘글로벌 콜센터’
인도의 벵갈루루와 하이데라바드는 정보통신(IT) 산업으로 유명하고,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인도 출신 고급인력이 넘쳐난다. 하지만 인도는 여전히 ‘글로벌 콜센터’ 취급을 받는다. 제조업 기반을 만들지 못한 탓이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정부는 잠재력을 현실로 끌어올리겠다며 지난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팹(생산시설) 생태계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100억달러의 인센티브를 쏟아부어 “2026년까지 인도의 반도체 시장을 630억달러로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가장 덩치 큰 프로젝트를 내놨던 폭스콘이 베단타와 갈라서버렸다. 모디 총리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이 손잡고 만들 공장은 모디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구자라트주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인도의 야심 찬 ‘반도체 드림’에 외부에서는 고개를 갸웃한 것이 사실이다. 작년에 베단타-폭스콘 합작회사 외에 2개 기업이 인도 정부에 공장 설립안을 내놨지만 이들도 순탄치 않았다. 아랍에미리트의 넥스트오빗벤처스가 중심이 된 국제 컨소시엄은 이스라엘 반도체 회사인 타워세미컨덕터를 기술 파트너로 삼아 30억달러 규모의 칩 공장을 짓겠다고 했지만, 미국 인텔이 타워세미컨덕터를 인수하면서 계획이 붕 떴다. 또 하나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아이지에스에스(IGSS)벤처스였는데 역시 30억달러 규모의 공장 설립안을 낸다더니 어쩐 일인지 중단했다.
그나마 인도 정부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건 미국 메모리반도체 회사 마이크론과 반도체 조립 공장을 세우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일이다. 모디 총리는 이를 지난달 미국 방문의 최대 성과로 홍보했다. 마이크론이 최대 8억2500만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비용 대부분은 인도 쪽이 낸다. 구자라트주에 짓는 반도체 조립 공장에 인도 정부와 구자라트 주정부가 27억5000만달러를 투자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마이크론과 건설하기로 합의한 것은 생산 공장이 아니라 조립·포장·테스트 시설이다.
<인디언 익스프레스> 등은 폭스콘 공장이 무산된 12일 “한국의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인도에 반도체 조립·테스트 시설을 만드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사실무근’이라며 보도를 부인했다. 에스케이하이닉스 관계자는 “미국 공장 설립 투자와 국내 용인 반도체 공장 추진이 우선이어서 인도 공장 설립을 검토할 여지도 없다”고 설명한다. 인도 대기업 타타그룹이 반도체 제조를 검토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회사 르네사스가 관심을 보였다는 보도도 나왔지만 역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힌두스탄 타임스>는 세계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의 20%가 인도 출신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지식재산권은 대부분 외국 기업이 갖고 있다. 미국의 매출 상위 10대 반도체 회사들은 인도에 디자인센터를 두고 있으나 생산은 하지 않는다. 인도는 단순한 반도체 생산기지를 넘어서 ‘지식재산의 토착화’를 원한다. 그런 구상이 휘청거리는 것은 이 원대한 기획 자체가 경제적 타당성에 근거하기보다는 지정학적 틈새를 겨냥해서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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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처지는 기술력
인도는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중국과 대만 관계도 전에 없이 험악해진 상황을 틈타 5년 안에 인도를 세계의 반도체 허브로 만들겠다고 했다. 모디 총리는 작년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핵심·유망기술 이니셔티브’(iCET)를 발표했고 지난달 방미에서도 기술 협력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다. 핵 문제다.
냉전 시기 핵 개발에 나선 인도는 그 때문에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인도는 핵확산방지조약(NPT) 가입도 거부해왔다. 미국은 국방과 우주기술의 수출을 규제하는 몇몇 조항들을 지금까지도 인도에 적용하고 있다. 인도는 미국과 기술 교류를 늘리면서 규제를 풀어가고 싶어 하지만, 중국과 사이가 나쁘기로서니 미국이 이 문제에서 인도에 호락호락할 것 같지는 않다.
지정학적 계산만으로 공장을 돌릴 수도 없다. 칩을 만들려면 공장이 있어야 하고,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며, 숙련된 인력이 많아야 한다. 생산한 칩을 소비할 자국 내 시장도 필요한데 인도는 아직 역부족이다. ‘인도의 실리콘밸리’라는 벵갈루루가 성장하던 1980년대에 이미 펀자브주에서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1989년 의문의 화재로 시설이 불타버렸다. 미국의 ‘칩4 동맹’에 들어가 있는 한국·일본·대만과 비교하면 인도의 기술 수준은 20년 정도 뒤처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 와 지정학적 기회를 노리지만, 역설적으로 여기서 다시 지정학이 인도의 발목을 잡는다. 미국은 ‘반도체 동맹국’들을 압박해 중국과의 거래를 줄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가 반도체 산업을 키우려면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의 상당수를 중국으로부터 사들여야 한다.
다급해진 인도는 대만과 관계를 강화하려 애쓰고 있으나, 그동안 중국을 의식해 대만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인도였다. 대만은 최대 반도체 회사인 티에스엠시(TSMC)가 인도에 거점을 만들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썼고 자유무역협정과 양자투자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인도는 정치적·산업적인 이유로 난색을 보였다.
딜레마에 빠진 인도를 중국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중국의 노동력이 칩과 전자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라며 “인도가 야심 찬 계획을 세운 것은 미국의 설득 때문이었겠지만, 지정학 중심의 발전 경로는 막다른 골목일 뿐”이라고 적었다. “미국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제조업 기반을 닦아라, 그러기 위해 중국을 포함한 파트너들과의 협력부터 시작하라”고 충고하면서 코끼리가 나룻배에 칩을 싣고 힘겹게 노 저어 가는 삽화도 곁들였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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