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온 고국 방문단을 기록하는 방식[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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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인천에는 아직 내리교회가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위치해 있는 감리회 소속 교회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설명에는 '아직 살만한 세상. 어려운 이웃을 돕는 직장인들' 이렇게 쓸 요량이었던거죠.
결국, 저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을 좁은 골목에 다 모으고, 독거 할머니까지 가운데 위치시킨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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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인천에는 아직 내리교회가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위치해 있는 감리회 소속 교회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벽돌 건물도 지금과 거의 같아 보입니다.
▶하와이로 이민을 가서 살던 교민의 자녀들이 한국을 방문한 모양입니다. 하와이 학생단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뜻밖에 ‘전북의 소리’라는 블로그에서 관련 소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23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하와이 학생단 군산에서도 성황’이라는 기사입니다.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포와(布哇)학생단 일행은 예정과 같이 지난 5일 오후 11시에 영광으로부터 군산에 내착 하였는데…. 군산역 앞에는 미선조합 양악대를 선두로 하여 오륙백명이 열을 작하여 성대한 환영이 있었다”
▶ 3주가 넘는 기간 동안 전국을 돌며, 행사에 참여하는 일정을 소화했던 모양입니다. 조국을 잃은 슬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20년 남짓 고생을 하고 자녀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해 미국의 스포츠와 음악회, 교육 상황을 증언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분들의 가슴은 얼마나 절절했을까요?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엉뚱할 수 있지만, 고국 방문단의 모습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식 기념사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취재 경험담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5년 전 쯤 어떤 중견기업의 독거 노인 돕기 캠페인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낡은 천정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집 주변쓰레기를 청소하는 장면을 기록해서 보도하는 일이었습니다.
7~8명의 회사 직원들이 현장에 참여했고, 저는 그 중에 젊은 청년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가 무거운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을 독거노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진설명에는 ‘아직 살만한 세상. 어려운 이웃을 돕는 직장인들’ 이렇게 쓸 요량이었던거죠. 그런데 한 십여 분쯤 지나서였을까요. 현장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한 여직원이 저에게 “왜 다같이 봉사하는데 한 사람만 찍으세요?”라고 농담반진담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요.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저는 ‘그림이 될 장면’을 하나 얼른 찍고 자리를 비켜주는 게 작업하는 분들과 독거노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저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을 좁은 골목에 다 모으고, 독거 할머니까지 가운데 위치시킨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신문에는 제가 처음에 찍었던 젊은 청년과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찍힌 ‘투 샷’사진이 실렸습니다.
▶ 우리는 기념사진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등장할 수 있는 사진이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뉴스를 전달할 방법이 있으니 사진을 다양하게 찍어 여러 등장인물들이 노출될 수 있도록 편집할 수 있지만, 예전에야 신문 지면이 유일한 매개체였기 때문에 한 장 또는 두 장으로 현장을 압축해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해야 할 사람이 많은 경우 사진기자는 기념사진이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 1920년대에 독일 히틀러는 사진을 갖고 대중을 선동하는데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평하고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 밋밋한 사진을 주로 게재했습니다. 주인공이 없는 사진. 그런데 이게 한국식 공정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100년 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인 하와이에서 한반도까지 고국을 잊지 않고 방문한 학생단 한명 한명이 소중했을 겁니다. 만약 기념사진의 형식으로 사진을 ‘박’지 않았다면, 참가한 학생들도 보는 사람들도 뭔가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 오늘은 100년 전 하와이 학생단의 기념사진에서 우리의 ‘보여주기 방식’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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