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디자이너의 ‘고민’과 마주하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2023. 7. 1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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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 - 전시의 경험, 장소의 기억을 디자인하기
‘에드워드 호퍼:길 위에서’ 전시디자인 맡아
성황리 끝난 휘트니 미술관 전시 한달 만에
일부 소장품 국내로 옮겨와 다시 선보여
뉴욕 전시장 환경의 무리한 재현보다는
서울시립미술관과의 창의적 절충안 마련
가벽 활용 주요작품 강조 작업에도 심혈
에세이집 ‘예술이 필요한 시간’ 최근 출간
전시공간 21곳 소개… 글·사진 자료 수록
여행책자처럼 경로·관람 방법 등도 안내
“전시디자인, 좋은 전시 위한 노력 중 하나
작품의미 곡해할 만한 무리한 장치 지양
전시장서 먼저 말 건네는 주인공은 작품”

◆전시를 거니는 경험을 가꾸는 일

전시디자이너의 과제는 전시를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는 일이다. 작품을 조명하는 동시에 전시를 거니는 경험이 특별하도록 공간의 생김새를 거듭 가꾸어 내는 작업이다. 전시디자인은 방문객의 경험에 직관적이고도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장소의 건축적 구조를 이해하는 한편 전시의 주제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기획자와 소통하며 장소를 구획하고, 작품군을 분류하고, 조도를 조율하고, 휴식의 틈을 마련할 방안 또한 고심한다.
전시디자이너 이세영
이세영(40)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2023)의 전시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공동기획하여 지난 4월20일 개막한 전시다. 해당 작가의 휘트니미술관 전시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지 한 달여 만에 일부 소장품을 국내로 옮겨 왔다.

이세영은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실내건축학 석사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디자인학 박사를 취득했다. 201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팅 인턴으로 재직하며 미술계에 입문했고,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를 거쳐 대림미술관 큐레이터로 근무했다.

전시디자인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15년 전시디자인 스튜디오 ‘논스탠다드(nonstandard)’를 설립하면서다.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 서울식물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 및 미술기관과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이력을 다졌다. 2017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전 ‘하이라이트’와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 ‘빛’ 등 국내 주요 대형 전시디자인을 총괄했다.

◆예술을 통해, 살아감의 동력을 얻기 위하여

이세영이 최근 에세이집 ‘예술이 필요한 시간’(2023, 마로니에북스)을 출간했다. 책은 그가 경험한 수많은 전시공간 중 21개 기관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장소마다 열 쪽 내외 분량을 할애하여 절반은 진솔한 글을, 다른 절반은 감각적인 사진자료를 수록했다. 하나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해당 기관을 찾아가는 경로와 관람 방법을 소개하는 한쪽의 살구색 지면을 만난다. 마치 여행 책자처럼, 장소로의 방문을 제안하는 경력자의 친절함에 웃음 짓게 된다.
이세영 에세이집 ‘예술이 필요한 시간’(2023, 마로니에북스).
글은 각각의 공간에 관한 글쓴이의 삶 속 기억을 하나씩 꺼내어 보인다. 미술이 좋아 업계에 발 디딘 그가 첫 직장인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서의 건축 공간을 바라보던 기억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독자의 마음도 기쁨으로 일렁인다. 그는 사무공간과 전시공간을 분리하는 동시에 유기적으로 연결지은 건물의 영리한 구조를 소개한다.

“무대의 뒤편, 혹은 숨겨진 세계에서 실제 세계로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비밀스러운 통로들”을 바라보며 매일을 시작했을 초년생의 설렘을 상상해 본다.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장소로 변모”하는 장소에서 “삶을 예술로 물들이는 방법”을 꿈꾸던, 빛나는 날들에 대하여.

부푼 마음의 크기만큼 괴로웠을 어려움과 실망의 순간들을 회상하는 문장에서 책장을 넘기던 손도 멈추어 선다. “일도 인간관계도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베네치아행 비행기표를 끊은 그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향한다. 그곳의 외벽에서 마우리초 난누치(Mauricio Nannucci)의 네온 설치작품 ‘변화하는 장소, 변화하는 시간, 변화하는 생각, 변화하는 미래’(2003)를 마주한다. 멈추지 말고 다시금 나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그 길에서 절대 잃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라고 말 없는 조언을 건네준 것 또한 미술이었다.
마우리초 난누치(Mauricio Nannucci)의 작품 ‘변화하는 장소, 변화하는 시간, 변화하는 생각, 변화하는 미래’(2003),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외벽 전경.
전염병의 유행으로 국내 많은 전시가 잠정 연기 및 취소되던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전시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전시를 감상하거나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했다. 이세영이 쓰길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한 이유, 그리고 전시 만드는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끊임없이 예술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미술을 끝없이 좋아하는 마음으로 전시와 작품을 그리워하는 진심이 그로 하여금 전시디자이너가 되도록 했을 것이다. 전시공간에 깃든 공기를 숨 쉬길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자신 스스로 관람객으로서의 경험을 더없이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이라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이세영은 해외에서 이미 선보인 전시 및 작품을 국내에서 다시 선보이는 데 있어 “서로 다른 기관의 비전과 아이덴티티를 관람객으로 하여금 동시에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고 고백한다. 기존 전시의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 알맞도록 세부 디자인을 조율하는 균형을 유념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2023,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의 두 전경. 전시를 연출한 이세영 전시디자이너는 여럿으로 나뉜 전시장 관람 순서를 조율하고 가벽을 활용해 주요 작품을 강조하는 작업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세영 제공
“디자인을 하는 내내 무엇보다 호퍼의 작품이 한국의 서울, 지금 우리 현실 속에서 관람객들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 전시장의 어떤 유혹적인 요소들보다 그 안에 걸린 호퍼의 그림 속 판타지에 빠져들길 바라면서 말이다.”

휘트니미술관의 전시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2022-2023)을 관람할 당시 그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백색의 벽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흰 벽면 위에 미술관 대표 소장품인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를 자신 있게 강조하는 면모가 드러났다. 그 경험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 담아내고 싶었다. 다만 두 기관의 건축은 외양과 역사 모두에서 매우 상이한 성격을 지닌다. 2015년 신축 재개관한 휘트니미술관 건물과 대조적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은 국가등록문화재인 서울 구 대법원 청사를 일부 재건축한 것으로서 오래된 바닥면과 거친 벽면, 혼잡한 천장 구조물 일부를 보존하여 활용하고 있다. 뉴욕 전시장의 환경을 무리하게 재현하기보다는 창의적 절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 전시장 바닥에서부터 3m 높이를 기준으로 아래쪽은 도색을 새롭게 하여 희고 매끈한 벽면을 구현하고 위쪽은 복잡다단한 천장 구조가 눈에 띄지 않도록 어두운 색상으로 일관되게 마감했다. 이로써 일정한 높이의 깨끗한 백색 벽면이 전시장을 메운 전경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세영의 말을 빌리면 “남겨진 벽이 아니라 그 어떤 부분보다 많은 공을 들인 세련된 흰 벽 위에 작품이 걸린” 것이다. 여럿으로 나누어진 전시장 관람 순서를 조율하고, 가벽을 활용하여 주요 작품을 강조하는 작업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전시디자인의 역할에 관하여

전시디자인에 있어 중요시하는 점이 무어냐고 묻자 이세영이 답해 주었다.

“전시디자인은 좋은 전시를 만들기 위한 여러 노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를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 요소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가진 의미나 해석을 곡해할 만한 무리한 장치들이 전시장에 개입할 때 가장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책 속에서도 연관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디자인에 함몰된 전시를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큰소리로 말을 건네는 주인공이 작품이 아닌 디자인이 될 때, 디자인이 작품을 압도하는 위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전시장에 간 목적과 이유를 잊고 혼란을 느낀다.”

작품을 위하여 공간을 다듬고, 전시를 위하여 장소를 가꾸어 내는 일. 바라보는 시선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걸어가는 동선이 배회하지 않도록 조용히 무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장소의 기억이란 다른 무엇보다 강렬하며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다. … 마치 뒤틀린 시공간 속에 던져진 것처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뮤지엄 마일을 걷는 나는 언제든 20대 초반의 시절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전시디자이너의 과제란 타인에게 그러한 장소의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는 노력이기에 한눈에 돋보이지 않지만, 누구보다 관람객의 마음을 세심하게 가늠하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전시가 조금 더 아름다운 기억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삶에 의미 있는 흔적으로서 깃들 수 있도록.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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