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열풍 타고 ‘황금세대’ 출격…여자월드컵 즐길 시간이야 [ESC]
“오른쪽이 비었다!” “뒤에 수비 붙는다!” 관중석에서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이어 ‘두둥둥 둥둥! 대~한민국!’ 익숙한 박자의 우렁찬 구호가 이어졌다. 경기장에 뛰고 있는 선수들과 같은 색깔인 붉은색 응원복을 입은 아마추어 여자축구팀 너티에프시(FC) 멤버들은 경기 훈수 두랴, 확성기와 태극기를 들고 붉은 악마의 선창에 맞춰 응원하랴 내내 분주했다. 이들의 모습에는 ‘12번째 선수’가 되어 그라운드를 누비겠다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지난 8일 한국 여자축구대표팀과 아이티 대표팀의 에이(A)매치 평가전이 열린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의 풍경이다. 전반전에서 한 골을 내준 한국팀은 후반 시작 4분 만에 조소현(35·토트넘)이 얻은 페널티킥을 지소연(32·수원FC)이 성공시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뒤이어 한국팀의 유효 슈팅이 이어지자 너티에프시 멤버들의 함성도 더욱 커졌다. 그리고 후반 36분 프리킥 상황에서 지소연의 패스를 받은 장슬기(29·인천현대제철)의 중거리 슛이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골대 위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짜릿한 2 대 1 역전승이었다. 한국의 본선 첫 상대인 콜롬비아(7월25일)는 아이티와 비슷한 공격 스타일을 구사하는 팀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회 직전 모의고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셈이다. 9127명의 관중이 모인 이날 경기장에서는 오는 20일 개막하는 ‘2023 오스트레일리아(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출정식도 함께 열렸다. 2019년 대회를 앞두고 서울 코엑스몰에서 대표팀 스태프와 관계자를 포함해 약 200여명 규모로 조촐하게 출정식을 열었던 것과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2010년 17살 이하 우승…이번엔?
여자축구를 향한 세계인의 열기가 뜨겁다. 지난해 영국에서 열린 여자 유로 2022에서 치러진 31경기에 관중 57만4875명이 입장했고 잉글랜드-독일 결승전을 보기 위해 8만7192명이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을 방문했다. 이는 남자 유로 2020 잉글랜드-이탈리아의 결승전 관중(6만7173명)보다 많은 수치다. 2022년 유럽축구연맹(UEFA) 보고서는 “유럽 여자축구의 상업적 가치가 10년 뒤 1조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밝혔다. 흥행 기대감은 티켓 판매량이 증명했다. 2023 여자월드컵 티켓은 개막을 약 한달 앞둔 지난 6월11일 103만2884장을 판매해, 직전 여자월드컵(2019 프랑스) 전체 판매량을 이미 뛰어넘었다. 이번 대회는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한 단일 종목 여성 스포츠 행사로 기록될 예정이다. 흥행 조짐이 일자 피파는 개막전 장소를 4만2512석 규모의 ‘시드니 풋볼 스타디움’에서 8만3500석 규모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로 변경했다.
올해로 9회차를 맞이한 이번 여자월드컵은 오는 7월20일부터 한달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린다. 슬로건은 ‘위대함을 넘어서’, 마스코트는 축구를 사랑하는 암컷 펭귄 타주니(Tazuni)다. 두 국가에서 공동 개최하는 것은 이번 대회가 처음이다. 남반구에서 열리는 것도 처음이라, 최초의 겨울 월드컵이 된다. 여자월드컵 사상 가장 많은 나라인 32개국이 본선에 참가한다.
에이치(H)조에 속한 우리나라는 호주 시드니에서 7월25일 콜롬비아, 30일 모로코와 맞붙는다. 이후 브리즈번으로 옮겨 8월3일 독일과 경기를 하게 된다. 피파 랭킹은 독일이 2위, 우리나라가 17위, 콜롬비아가 25위, 모로코는 72위여서 비교적 무난한 조 편성으로 평가된다. 다만 독일·콜롬비아·모로코와 대표팀 간 경기를 치른 적이 없어 결과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 여자축구 대표팀은 2003년, 2015년, 2019년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 월드컵 본선이다. 2015년 대회에서 16강 진출이 최고 성적이다. 대한민국 여자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다. 당시 17살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한국은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20살 이하 여자월드컵에서는 3위에 올랐고, ‘여자 메시’ 지소연은 피파가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서 한국 선수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실버볼을 수상했다. 세계적 선수로 발돋움한 지소연은 잉글랜드 첼시위민에서 8년간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최근 그와 만나 인터뷰집(<너의 꿈이 될게>)을 낸 이지은 편집자도 지난 8일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설레는 마음으로 마지막 평가전을 지켜봤다.
“한국 여자축구를 지탱해온 황금세대 선수들의 조합을 기대하며 봤어요. 지소연 선수도 2010년 20살 이하 여자월드컵 당시 4강까지 갔던 때를 언급하며 그때만큼 팀 분위기가 좋다고 언급했거든요.”
2010년 20살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지소연과 무적의 공격라인을 형성했던 전 국가대표 김나래(33)씨도 이번 월드컵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친구들이 다 같이 뛰는 걸 볼 수 있는 마지막 월드컵일 것 같아 기대하고 있어요. 월드컵만 세번째인 선수도 여러명이라 호흡이 잘 맞아요.”
토트넘 홋스퍼 에프시 위민 소속의 조소현은 대표팀 경력만 16년이다. 역대 에이매치 출전 144경기로 한국 남녀 선수 통틀어 최다 기록이다. 골키퍼 김정미와 주장 김혜리, 이금민도 지소연과 함께 이번이 세번째 월드컵이다. 김씨가 꼽은 이번 월드컵 관전 포인트는 이렇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확실히 개성이 강해요. 빠르고 와일드한 공격수도 있고 섬세한 수비수도 있어요. 각자 스타일이 다르다는 게 강점이에요. 이번에는 어린 선수들이 발탁돼 그 재미가 더해질 거예요.”
최연소 국가대표인 혼혈 선수 케이시 유진 페어(16)는 골키퍼 김정미(39)와 23살 차이다.
“풋살에 빠지니 선수 움직임이 보인다”
지난 8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여자축구팀을 열렬히 응원한 너티에프시는 2019년에 창단했다. 축구팀 이름에 붙는 에프시(FC)는 보통 ‘풋볼 클럽’(Football Club)의 약자이지만 이 팀의 에프시는 ‘풋볼 크리에이티브’(Football Creatives)를 뜻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축구 훈련뿐 아니라 축구와 관련된 창의적인 활동을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너티에프시를 만든 정지현(29)씨는 월드컵을 즐길 준비로 설레고 있는 팀을 이끄느라 분주하다.
“모두가 함께 즐기는 전세계인의 축제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필 더 페스트!’(Feel the fest!)라는 슬로건을 만들었어요. 슬로건을 내세운 여러 이벤트를 기획 중입니다. 하나가 되어 월드컵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외국 여자축구 인플루언서와 협업해 영상을 만들고 있어요. 축제 하면 떠오르는 풍선, 불꽃, 맥주, 피자, 잔디 등의 요소를 활용해 기념 저지도 디자인했어요.”
너티에프시는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자축구 문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7월30일에 있을 모로코전과 결승전에 맞춰 단체 관람 행사를 열 예정이에요. 서울 동대문에 있는 축구 편집숍 ‘카포스토어’를 빌렸어요. 매장에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나 너티에프시의 에스엔에스(SNS) 팔로어가 모여서 경기를 함께 응원했으면 해서요. 여자축구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고 더 많은 사람이 입문할 수 있도록 여러 이벤트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정씨는 모로코전 단체관람이 끝난 뒤 곧 호주로 떠나 여자 대표팀 경기를 ‘직관’할 계획이다.
“현장에서 축구팬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봐온 국가대표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는 마지막 월드컵일 것 같아서 꼭 보러 가려고 해요.”
‘직관’이나 단체응원이 아니어도 축구를 향한 열정만 있으면 월드컵을 즐길 수 있다. 전 국가대표 김나래씨는 “경기장에 가기 어려우면 각자의 생활 공간에서 유니폼을 맞춰 입고 선수들의 호흡과 응원단의 분위기에 휩쓸려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월드컵의 묘미”라고 했다. 편집자 이지은씨는 “호주와 뉴질랜드는 한국과 시차가 적어 게임을 즐기기에 더욱 좋다”고 했다. 7월25일 콜롬비아와의 경기는 우리나라 시각으로 오전 11시, 7월30일 모로코전은 오후 1시30분, 8월3일 독일전은 저녁 7시에 시작된다. 16강, 8강 진출 등 성적이 좋으면 시민들의 자발적인 거리응원이 이어질 수도 있다.
국내 여자축구 붐의 일등공신은 2021년 6월에 정규 편성된 <골 때리는 그녀들>(골때녀)이다. 올해 3월 시즌4 방영을 시작했고, 결승전에는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콜린 벨 감독을 초대해 관전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골때녀>의 채주희 작가에게 여자축구의 인기를 실감하는지 물었다.
“2년 전에는 연습경기를 할 팀을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지금은 여성 풋살 동호회가 많이 생겨 여러 팀과 돌아가며 경기를 할 수 있어요. 심지어 풋살장에 가면 앞뒤로 여자 선수들일 때도 있어요. 내심 뿌듯하죠. 그에 맞춰 저희도 2023 여자월드컵을 향한 관심과 호응을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지소연 인터뷰집을 출간한 편집자 이지은씨도 <골때녀>를 보고 풋살을 시작한 주변 지인들에게 설득돼 축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수영이나 요가 같은 개인 운동을 하다가 팀 스포츠를 해보니 에너지가 좋더라고요. 일주일에 네번 공을 차러 가기도 하고 팀원들과 더블유케이(WK)리그를 보러 가기도 하며 17개월째 축구에 푹 빠져 있어요. 풋살을 배우며 선수의 움직임을 이해하게 되고, 좋아하는 축구선수도 생겼어요. 이번 월드컵이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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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팀 스포츠 ‘시대적 흐름’
나이키는 이번 여자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을 위한 유니폼을 처음으로 제작했다. 남자 대표팀 유니폼 디자인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과거와 달리 처음으로 여성 선수만을 위한 유니폼을 디자인한 것이다. 나이키는 여자 대표선수들의 체형 정보를 확보해 체형이 각기 다른 여자 선수들의 움직임을 돕고 월경 기간에도 움직임에 무리가 없도록 바지에 라이너를 적용했다. 생리혈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기술이다. 여자축구 열기를 바탕으로 스포츠 브랜드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아디다스는 지난 7일 여자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아디다스 우먼스 서울 풋살컵’을 열었다. 140여개 풋살 팀 중 선발된 16개 팀이 실력을 겨뤘고 남자 대표팀 주장 손흥민 선수가 아마추어 선수들을 상대로 원포인트 레슨을 진행하기도 했다. 푸마도 패션 브랜드 무신사와 손잡고 오는 16일부터 ‘더플레이어 풋살 퀸즈컵’ 대회를 연다. <골때녀>에서 시작된 여자 축구의 인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편집자 이지은씨는 “골때녀를 보고 풋살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스포츠 업계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여자들의 ‘몸매’가 아닌 기능적인 몸에 집중하게 되었고, 팀 스포츠가 확실한 관심사가 되었다. 이젠 시대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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