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예쁜 거 알지만 굳이 안 고칠래 [맛없는 나라, 맛있는 음식 이야기]
〈더 타임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는 평을 들은 빌 브라이슨은 미국 태생이다. 대학생 때 유럽 여행을 왔다가, 아내가 될 여성을 영국에서 만났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마친 후 영국에 눌러살고 있다. 영국 음식에 대해 아무리 악평을 해대도, 영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이렇게 늘 있는 법이다. 그들이 영국을 사랑하는 것이 음식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브라이슨은 〈발칙한 영국 산책〉이라는 책에서 ‘묵묵히 의무를 수행하듯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디저트 트롤리가 식당에 등장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풍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영국 사람들은 디저트를 비롯한 ‘단것’에 진심인데, 디저트를 먹기 위해 메인을 먹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보통의 식사 코스인 스타터-메인-디저트 대신 디저트-디저트-디저트로 먹고 싶다고 하기도 한다. 어쩌면 많은 영국 사람들에게 식사는 디저트를 먹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다. 어린 시절부터 ‘너의 접시에 놓인 시금치나 브로콜리 등을 다 먹지 않으면 디저트는 없다’는 말을 듣고 자라서일까?
영국은 17세기 초반에 노예노동을 이용한 카리브해의 설탕 농장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그리하여 영국 사람들은 그전까지는 꿀 정도를 통해서나 맛볼 수 있던 귀한 단맛을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650년대 1인당 1㎏이 채 안 되던 영국인의 연간 설탕 소비량은 20세기에 이르러 40㎏이 넘게 된다. 설탕 내지 단 음식은 영국인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시는 차와 함께 먹기도 하고, 식사나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국인이 혼자 차를 마신다면 비스킷 한두 개 정도를 곁들일 것이다. 만일 이웃이 예고 없이 방문해 집에서 함께 차를 마시게 된다면 수제 케이크를 한 조각 같이 낸다. 아직도 전업주부들은 이런 단순한 케이크가 집에 떨어지지 않게 한두 가지쯤 만들어 두는 경우가 많다. 화려한 장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케이크지만, 촉촉하고 폭신한 케이크는 수다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기본 준비물이다.
스펀지케이크는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설탕, 버터, 달걀로 만든다. 부재료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면서 이름도 덩달아 달라진다. 19세기 상류층이 마데이라 와인과 즐겨 먹었다는 마데이라 케이크, 레몬즙과 시럽을 듬뿍 뿌린 레몬 드리즐 케이크, 양귀비씨를 넣은 시드 케이크 등이 스펀지케이크 범주에 들어간다. 만들기 쉬운 케이크이지만 나름의 기준이 있어서, 촉촉하고 적당히 달고 폭신해야 한다. 케이크에 대한 영국인들의 기준은 도저히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드라이하다거나 너무 달다거나 무겁다거나 빵 같다는 표현을 들으면 동네 축제에 기부하는 케이크로서도 불합격이다.
만일 좀 더 공을 들이고 싶다면 배턴버그 케이크를 만든다. 이 케이크는 상대적으로 손이 많이 가므로 자주 만들지는 않는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아버지인 필립 공의 외할머니 빅토리아 공주와 배턴버그 공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고안된 케이크다. 단면의 1·3분면과 2·4분면의 색을 대비가 되게 만든다. 기본형의 경우 바닐라 스펀지케이크, 딸기 스펀지케이크를 각각 구운 다음, 단면이 정사각형이 되도록 자른다. 이것을 아랫면은 바닐라-딸기로, 윗면은 딸기-바닐라 순으로 쌓는데, 네 덩어리의 스펀지케이크에 살구잼을 발라서 붙이고, 그 바깥을 마지팬(설탕과 아몬드를 버무린 반죽)으로 마는 것이다.
스펀지케이크 중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단연 빅토리아 스펀지케이크다. 영국에서 단순히 케이크(the cake)라고 하면 이 케이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영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베이킹파우더가 발명되면서 탄생한 케이크다. 기존 파운드케이크에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더욱 가벼운 케이크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빅토리아 스펀지케이크는 두 장의 수지 케이크 사이에 잼을 바르고 위에 설탕을 뿌린 것이다. 물론 요즘은 위나 옆에 생크림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고, 여러 장 겹치기도 한다. 초콜릿이나 과일 케이크로 변형시키거나, 작은 크기로 컵케이크를 만들 수도 있다. 조금 특별한 날이라면 장식을 더할 수 있다. 물론 장식을 한다 해도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프랑스나 일본식의 케이크는 탄생하지 않는다.
부순 머랭으로 만드는 ‘영국적인’ 케이크
한 영국인 지인에게 스펀지케이크 외에 영국스러운 디저트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이튼 메스를 골랐다. “프랑스 사람들은 완벽하게 예쁜 디저트를 만드는데, 머랭을 치다가 부서진 걸로 만드는 게 너무 영국적이지 않냐”는 말을 곁들이며. 이튼 메스는 1893년 처음 기록에 등장한다. 영국의 유명 사립학교인 이튼 칼리지에서 경쟁자인 해로 스쿨과 연례행사인 크리켓 경기를 할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이튼 메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달걀 흰자에 설탕을 넣고 거품을 내어 머랭을 만든다. 그러고는 굳이 잘 만들어진 머랭을 큼직하게 부숴서 엉망(메스, mess)이 되게 한다. 딸기에 설탕을 넣고 딸기가 살짝 뭉개질 정도로 끓여서 만든 소스와 휘핑크림을 부서진 머랭 위에 층층이 올려 흰색과 빨간색의 대비가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머랭을 더 크게 굽고, 그게 부서지지 않고 온전하면 이는 파블로바라고 부른다. 어떤 설에 따르면 떨어뜨린 파블로바를 주워서 접시에 담은 것이 이튼 메스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잔뜩 신이 난 강아지가 파블로바 접시를 뒤집는 바람에 탄생한 것이 이튼 메스라는 설도 있다.
말하자면 영국의 디저트 내지 단 음식은 눈으로 즐기는 용도라기보다 실용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그것이 화려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예쁘게 만들려고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 디저트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이 많고 알기도 잘 알지만, 굳이 고치려 노력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자기 방식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가장 영국인다운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게 좋아 보이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또한 마음먹으면 변화를 급격히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이 영국인들이기도 하다. 한식이 열풍인 요즈음 가장 영국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 시골의 펍에서도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우기는 음식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한식과는 좀 다르다. 이 고집 세고도 유연한 영국인들 사이에서 한식이 어떻게 자리 잡을지 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 이번 호로 ‘맛없는 나라, 맛있는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세정 (변호사)·최은주 (이학박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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