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더 게임』 김인숙 “돌벽에 비가 젖어드는 분위기의,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범죄소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3. 7. 15.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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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런 성에 도착한 날이었다. 성은 아름다웠지만, 돌로 된 곳이라서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시차나 기후 등에 아직 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숙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 비에 돌로 된 벽이 젖어들고 있었다. 비에 서서히 젖어드는 돌벽. 저런 분위기를 담고 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5, 6년 전, 중견 소설가 김인숙은 2개월간 이탈리아 성에서 생활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첫 문장을 써내려갔다. 시계를 보자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을, 지금 무엇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담은. “발소리가 들린다. 나를 쫓아오고 있다. 쉿, 그가 오고 있다”고.

그리하며 오랫동안 좋아했던 추리 소설이나 범죄 소설의 방법과 자신의 평소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결합하는 한편, 스스로 왜곡해 가는 기억을 비롯해 기억에 대한 오래된 사유를 담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추리 소설이나 범죄 소설을 매우 좋아했지만, 너무 알맹이 없이 기법으로만 가는 작품이나 너무 잔혹한 건 싫었습니다.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추리나 범죄 소설 형식에 제가 갖고 있는 어떤 무거움을 얹혀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요. 내용상으론, 이미 여러 단편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기억에 대한 것들, 스스로 왜곡해 가는 기억들, 자기가 사실이나 진실이라고 믿는 왜곡된 기억이 얼마나 큰 파급과 파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어요. 둘이 만나졌던 거죠.”

3년 전, 그는 문학동네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인숙은 연재했던 소설을 다시 다듬고 고친 뒤 3년 만에 장편소설 『더 게임』(문학동네)를 최근 펴냈다. 등단 40년을 맞은 그의 첫 본격 장편 추리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 황이만은 자수성가한 게임사 대표로, 오래 전 데이트 도중 칼부림을 당하고 여자 친구가 종적을 감춰버린 사건 때문에 늘 울분에 차 있고 억울해 한다. 어느 날, 섬뜩한 일러스트가 담긴 낯선 이메일을 받고 TV에서 자신이 칼부림을 당한 골목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한 그는, 오래 전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퇴직한 베테랑 형사 안찬기에게 사설탐정 역할을 의뢰한다. 안찬기가 사건 조사에 나서면서 백골로 발견된 남동생을 20여 년간 찾아다닌 미스터리한 누나 김주희를 비롯해 인연의 연쇄들이 하나둘 베일을 벗고, 마침내 22년 전인 1994년 그날 골목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상일이라는 게 추리소설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도 알았다. 세상은 대개 짐작할 수 있는 일들로 이루어지고, 삶은 그 짐작할 수 있는 일들에 매번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313쪽)

소설이 다다른 진실 앞에서 한동안 침묵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왜냐하면, 피해자로 착각하는 가해자의 기만과 자기기만에서 자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통렬한 자각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견 작가 김인숙은 왜 본격 추리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등단 40년’의 ‘소설 장인’이 펼쳐 보여주는 추리소설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김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5년 전부터 썼고, 3년 전 연재한 뒤, 최근에야 책으로 묶어내게 됐는데,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요.

“소설을 쓸 때 어떤 시간이나 장소, 사건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묘사하면 장점도 있겠지만, 저의 경우 그로 인한 제한되는 게 싫거든요. 열려 있어야 (독자들이) 자기 공간으로 상상하거나 자기 경험과 맞물려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장소의 경우 조금 흐려놨지만, 시기를 1994년 여름으로 특정해놓고 가버렸잖아요. 주인공 황이만의 나이도 몇 년생이라고 나오진 않지만, 1994년에 20대였으니까 현재는 40대 초반이라고 설정을 했죠. 그런데 작품이 3년, 5년이 지나면서 주인공도 자꾸 나이를 먹잖아요. 이 사람 생각이 맞나 자주 생각해야 했어요. 소설을 쓰고 출간하는 사이, 주인공이 나이를 먹고 팬데믹이 발생하는 등 사회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희한한 케이스였습니다.”

―웹진에 연재를 하기 전, 그러니까 소설을 꽤 쓴 상태에서 소설 속 인물 가운데 핵심 인물 한 사람을 뽑아서 중편 『벚꽃의 우주』(현대문학)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한 작품에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잖아요? 주인공이 있고 조연이 있고 엑스트라가 있지만,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엑스트라가 아니죠. 모두가 자기 삶과 사건의 주인공인데, 소설이 그것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걸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벚꽃의 우주』가 먼저 나오면서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 돼버렸어요. 왜냐하면, 독자들에게 저 책을 먼저 읽고 오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고, 이 작품 자체가 완결이 돼야 하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주요 인물들이 계속 소통을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굉장히 많이 고쳐 써야 했지요. 쓰는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일 자체는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어떤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못하지만, 뒷면에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폭풍을 겪고 있는 인물들이 있지요. 이 작품이 그 이야기의 1이라면, 『벚꽃의 우주』가 2, 이어서 제3의 얘기가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각각 존재하면서도 서로 얽혀서 폭풍이 되고 슬픔이 되는 것을 쓰고 싶어요.”

―범인이나 인과가 분명한 보통의 추리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듭니다. 왜 이렇게 느끼게 되는 거죠?

“범인이나 사건의 인과관계는 이미 출간된 『벚꽃의 우주』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만, 추리소설이라면 문법상 범인이 정확해야 되는 게 맞지만, 이 소설의 경우 범인보다는 주인공 황이만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요. 황이만 때문에 일어났던 최초의 파동과, 그로 인해 벌어진 비극들을 좀 열어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범인에 대해서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한 황이만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었죠.”

―주인공 황이만은 처음에는 마치 피해자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기우뚱하면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해가게 되는데요, 독자 입장으로선 묘한 기분이 듭니다.

“일부러 의도적인 것일 수 있고,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가해자들도 현실에선 참 많습니다. 자신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 놓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도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안찬기는 처음 황이만을 믿었다가 나중에 믿지 않게 된 다음 모든 걸 밝혀내게 되는데, 저도 똑같은 과정을 밟았던 것 같아요. 황이만의 기억을 벗겨 나가면서 제가 안찬기가 된 것 같아요. 보통의 추리소설은 범인이 다 있어야 하고, 한 사람도 무대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안 돼죠. 저는 황이만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그를 먼저 등장시켜 놓고 함께 갔거든요. 전 항상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황이만의 위선이 벗겨지는 과정이 작가로서 굉장히 쇼킹했어요. 자기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자기를 속여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주인공 황이만 외에 어떤 인물에 가장 애정을 갖고 썼는지요.

“우선 『벚꽃의 우주』에 나왔던 주인공에 애정이 갔기 때문에, 먼저 뽑아서 썼겠죠.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의 일탈은 중요하지 않은 일탈이죠. 대부분 십대의 방황이라고 쉽게 지나갈 수 있었을 텐데, 황이만이 하필 그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아이들의 인생도 꼬여버린 거거든요. 아이들만 꼬인 게 아니라, 아이들과 상관이 없고 황이만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도 엮이게 되고요. 엮이고 또 엮이게 되다 보면 최초의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인생이 파탄에 이르게 되는 사람도 생기게 되기도 하죠. 그럼 황이만은 어디까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어디까지 사과를 해야 하냐는 거예요. 대답을 할 수 없지만, 많은 질문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벚꽃의 우주』에서 펜션 여주인 이야기를 했던 거거든요. 이 책에서 다시 또 한 사람을 뽑아서 주인공으로 얘기하고 싶다면, 누나 김주희를 쓰고 싶군요. 실종을 다룬 소설들이 굉장히 많은데, 실종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슴이 미어지게 봤어요.”
―인물과 문장이 기존 추리소설과 크게 달라서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리 추리소설을 써도 김인숙의 추리 소설이 될 수밖에는 없을 터이니 더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제 문장은 살아있고, 제가 해왔던 시선의 방향이 존재할 것이어서 오히려 더 많이 덜어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무엇을 덜어내려 했습니까)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문체를 조금 덜어내려고 했고, 대신 조금 더 가볍고 속도감 있게 가려고 했어요. 언젠가 편집자에게 제대로 된 B급 추리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B급 추리소설이 되기 위해선 스킬과, 능란함과, 배짱과, 능청스러움도 있어야 하는데, 저는 수줍은 사람인 거예요.(이번에 점수를 준다면요) 지금 욕심이 있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열댓 명이 각각 주인공으로 나오는 추리소설을 열댓 권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다 자기 인생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죠. 중심 사건은 이미 하나 던져져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떡볶이를 먹는 남자가 나오는데, 그런 사람까지도 등장시켜서 1994년 사건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연쇄 살인마도 자기 자식한테 좋은 아빠일 수 있고 연인에겐 설레는 감정으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면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 위선과 기만과 자기 허위가 만들어내는 파장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가 있거든요.”

―이번 작품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보도 자료엔 ‘본격적으로 시도한 첫 추리소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단편에도 추리 기법이 들어간 작품이 있고, 『벚꽃의 우주』도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제가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작품을 이번에 쓴 것 같아요.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독서의 즐거움을 많이 잃었어요. 왜냐하면, 글쓰는 사람에겐 독서 자체도 일, 공부가 되거든요. 온전히 독자가 되고 싶을 때는 추리 소설이나 범죄 소설을 읽었어요. 배우고 질투하고 기억하려는 작가 김인숙을 잊어버리고, 온전히 독자 김인숙으로 읽고 싶을 때 읽었거든요. 제 소설도 그냥 이렇게 읽으면 좋지 않나, 난 왜 이렇게 안 써,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했는데, 금방 쓰기는 어려웠죠. 그런데 이렇게 시작한 것 같아요.”

―국내에서도 최근 적지 않은 순문학 작가들이 추리소설과 SF를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순문학이 있고 그 바깥에 추리 소설, 역사 소설, SF 등 장르소설이 마치 하위 문학처럼 있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르라는 말 자체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론 누쿠이 도쿠로(貫井德郞)를 비롯해 일본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해요. 사건만 흥미위주로 가는 게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서 인물도 살고 사건의 의미도 그 사이에 던져지니까요.”

“아무 학습이 되어 있지 않던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는데) 그 순간 벌판에 내던져진 거죠.” 소설가로서 원점을 묻자, 그는 아무래도 스무살 때의 신춘문예 당선이었던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단이 뭔지도 몰랐고, 순문학이 뭔지도 몰랐으니까요. 친구도 없고, 스승도 없었고요. 그때부터 모든 것을 그냥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반 활동도 했다. 문예반 담당 교사는 시조 시인. 백일장에 나가서 곧잘 상도 받았다. 글을 계속 썼으니까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고, 글을 제법 쓴다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청소년 시절, 꿈 리스트에는 작가가 없었다. 글 쓰는 일을 결코 전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굳이 글을 쓴다면, 부업이나 취미 정도로 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대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신방과, 특히 연세대 신방과를 가고 싶었다. 피디나 기자가 되고 싶었다.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순탄하게 나아간 것이야말로 오히려 위기였던 것일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희망하던 연대 신방과에 들었다. 심지어 백일장처럼 생각하고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덜커덕 당선됐다. 1983년, 그는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때 그의 나이 약관의 스무 살. 그 순간, 그의 인생과 문학은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가 김인숙의 원점이었다.

“신춘문예에 갑자기 당선되는 바람에 제 인생이 달라져 버린 겁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소설가로서 저의 출발점은 그냥 신춘문예 당선 그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저는 모든 고통과 고뇌를 다 겪었으니까요.”

그래서 곤궁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했던 것이었을까. 갑자기 어마어마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자, 그를 ‘소비’하려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의 글이나 작품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스무 살 여대생 작가를. 순탄했던 삶의 모든 것이 깨져버렸다. 그에겐 빠른 등단이 결코 영광이나 영화의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고, 그는 토로했다.

“힘든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십 년 전인데, 지금 생각해도 아플 때가 있어요. 스무 살 어린애를 (단위에) 올려놓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건 흔드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 어린 아이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가끔 화가 나고 그래요.”

1963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인숙은 1983년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다. 같은 해 장편소설 『핏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갑작스럽고 돌연하게 작가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그는 등단 40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무려 40년을 전업 작가로 버텨낸 것이다. 꿋꿋하게, 쓰러지지 않고.

“만일 제가 내일 죽는다면, 뭐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전업 작가로서 안 좋았던 면과 대차대조를 해보면,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아요. 작품을 쓸 때마다 항상 아쉬웠어요. 죽는 날까지 100점짜리 작품을 어떻게 쓸 수 있겠어요? 40년 동안 늘 다음 작품을 생각했지요.”

그는 등단 이후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꽃의 기억』, 『봉지』, 『소현』, 『미칠 수 있겠니』, 『모든 빛깔들의 밤』 등을, 소설집 『칼날과 사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단 하루의 영원한 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독자들을 위해서 작품 세계를 조금 소개해 주신다면.

“어떻게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있을까요? 작가도 나이를 먹고 끝없이 시대와 조응하기 때문에 20대 때 썼던 소설과 30대 때 썼던 소설이 다를 수밖에 없고, 계속 달라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자기의 믿음이나 그런 것들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면, 만나는 방식 자체는 계속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는지요)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진 작가였습니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대중통속 작가라고 했었고, 그다음에는 운동권 작가라고 했었죠. 한동안 페미니즘 작가라고 했었고, 지금은 중견 원로 작가라고 얘기하는 것 같네요. 불렸던 이름이 너무 다양해 제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게 있다면, 개인의 삶이 사회와 유리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모든 소설은 개인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해요. 존재하는 자리를 떼어낸 상태의 개인은 없다고 생각하는 건 항상 같은 것 같아요. 20, 30대 뜨거웠던 시절에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좀 더 직접적으로 그렸다면, 지금은 조금 더 다양하고 폭넓게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분노와 항변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변명을 생각하고, 이유를 생각해요. 왜 그래야 했을까, 하고. 결국 나이가 주는 유연함일 수도 있고, 나이가 주는 소심함일 수도 있겠지요. 소설가는 결국 소설로 말하는 게 최고죠.”

―김인숙 소설쓰기의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입니까.

“제 소설은 대체로 열려 있는 결말인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나쁘게 이야기한다면, 작가가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에 열어 놓고 그냥 끝내버린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죠. 저는 열려 있는 결말을 굉장히 잘 쓰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왜 열린 결말인가요) 삶에는 정답이 없으니까요. 삶 자체가 아귀가 딱딱 맞는 게 아닌데, 자로 잰 듯이 재단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삶이라는 게 비슷하게 보여도 얼마나 다양한데요. 소설이 좋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의 삶이 녹아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결말이) 열려 있지 않으면 자기를 녹여서 그 안에 들여보낼 수 없잖아요. 남의 이야기가 돼버리는 거잖아요. (열린 결말을) 잘못 쓰면 굉장히 무책임하고 느슨하고, 혹은 실패를 가려 덮어놓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잘 열어 놓으려고요.”

―작품이나 작가로서의 비전이나 꿈은 어떤가요.

“40년 동안 전업 작가로서 얼마나 많은 것을 썼고 또 얼마나 많이 실패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또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 욕구가 있어서 40년간 계속 쓰고 있는 거잖아요. 거창한 것은 없고, 지금도 다음에 쓰고 싶은 소설만 생각해요. 아마 그게 떨어지는 순간, 끝이겠죠. 지금도 딱 한 곳만 생각해요. 다음번 장편으로 이런 것을 써봐야지, 하고.”

―하루 루틴이나 일상은 어떤지요, 최근 변화한 게 있나요.

“오래 전부터 아침형 인간이어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제일 먼저 하는 게 글쓰기입니다. 보통 6시쯤 일어나서 9시까지 쓰는 것과 관계된 일을 해요. 3시간 동안 글을 쓴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그렇게 쓰지도 못해요. 마감이 있으면 하루에 6시간도 쓰지만, 일반적으로 3시간 이상을 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힘들더라고요. 그다음부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그게 하루 전체예요. 그 사이 운동도 하고, 이렇게 사람을 만나거나, 책을 읽고, 심사 있으면 하고. 대부분 비슷해요. 무엇을 파고드는 것을 좋아해 어떤 것에 몰두할 땐 그것만 주로 하거든요.(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주로 걸어요. 한 시간 정도 집 주변을 걷기도 하고, 한 시간 정도 집 안에서 운동도 하는 것 같아요.”

그가 인터뷰에서 조금 펼쳐서 보여준 세상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등단 이후 허허벌판에 내던져 졌다니, 삶의 격정이 폭풍처럼 몰려왔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니. 거기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은 것이라거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게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건 매우 이른 시기에 등단했다거나, 화려한 조명 속의 있던 그의 모습만을 생각한 단편적이고 피상적 사고에 대한 한 총체적 인간의 통렬한 반격이자, 다채로운 삶의 실존적인 복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자에게 남은 희망 가운데 하나는 오랫동안 도서관을 좋아했고 여전히 도서관에서 꿈을 키워가는 도서관 키즈라는 그와의 일치였고, 다른 도서관 키즈를 위해서 조그만 일이라도 해보자는 소박한 의기투합이었다. 그는 이전에 사는 곳에선 10분만 걸어도 도서관이 있었지만, 서울에선 오히려 쉽게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기자 역시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경기도 도서관을 다니고 있다고 한탄했고. 그리하여 그날 우리는 서울의 도서관 문제를 짚는 글을 각자의 방식으로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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