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가 된 '작은 용'…사망 50주기, 이소룡을 기억하다[피플in포커스]

박재하 기자 2023. 7. 15.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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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의 영화로 신화가 된 이소룡…대중문화의 아이콘
무술의 대중화, 액션영화의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
홍콩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에 설치된 이소룡의 동상. 2019.08.27/ ⓒ 로이터=뉴스1 ⓒ News1 박재하 기자

(서울=뉴스1) 박재하 기자 = 1973년 7월20일. 영화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젊은 배우가 거짓말처럼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이름은 이소룡(李小龍). 겨우 32세였다.

이소룡은 단 다섯 편의 주연 영화를 남기며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겨 신화가 됐다.

춤을 추듯 휘두르는 쌍절곤, 노란색 운동복, '아비요'라 외치며 상대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모습까지. 이소룡의 유산은 대중문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최고의 순간에 허망하게 가버린 인생이었지만 '작은 용'은 영원히 살아 있는 '불사조'로 다시 태어나 사망 후 50년이 지난 오늘도 회자하고 있다.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으로 촉발된 홍콩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던 2019년 7월 홍콩의 민주화 지지하는 포스터들이 붙은 '레넌벽'에 이소룡의 사진이 걸려있다. 2019.07.16/ ⓒ 로이터=뉴스1 ⓒ News1 박재하 기자

◇이소룡(龍), 용의 해에 태어나다

이소룡은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1940년은 중국인들에게 경계와 보호의 상징인 용의 해였다.

이소룡은 공부보다는 '거리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았고 툭하면 또래들과 싸우는 문제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싸움에서 진 이소룡은 부모를 졸라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때 만났던 스승이 바로 '영춘권'의 대가 엽문(葉問)이었다.

이소룡이 처음 무술을 시작한 계기는 유치했지만 그는 수련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때의 배움으로 이소룡은 향후 무술을 싸움의 기술에서 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절권도'를 창시한다.

그러다 이소룡은 19살 때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떠난다. 그는 시애틀 차이나타운의 중국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고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워싱턴대학교에 진학했다.

이소룡은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 연극을 공부했고 문제아였던 그는 사유하는 청년으로 탈바꿈한다. 1964년에는 린다 에머리를 만나 결혼한다.

이소룡의 명작 '정무문'이 40년만에 광주극장 스크린에 올려진다. ⓒ News1

◇'사이드킥'에서 '슈퍼스타'로

학업과 무술에 정진하던 이소룡은 1964년 TV 시리즈 '그린 호넷'에서 주인공을 돕는 동양인 사이드킥인 카토(Kato) 역할을 맡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단 한 시즌에 그쳤지만 이를 계기로 이소룡은 더 많은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경력을 쌓기 위해 이소룡은 무술영화가 태동하던 1971년 홍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된다.

이소룡은 같은 해 첫 주연 장편영화인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으로 데뷔한다.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소룡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산대형'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이소룡은 다음 해 개봉한 '정무문'(精武門, Fist of Fury)으로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일본인 도장에서 1대 100으로 결투하는 장면과 트레이드마크인 쌍절곤 액션이 바로 정무문에서 나왔다. 이 장면들은 그의 열렬한 팬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2003년 '킬빌'(Kill Bill)에서 오마주하기도 한다.

이후 이소룡은 각본과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을 맡은 '맹룡과강'(猛龍過江, The Way of the Dragon)으로 다시 한번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이소룡을 전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만들어 준 영화는 1973년작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다. '용쟁호투'는 전 세계에서 9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는데 이 영화로 이소룡은 슈퍼스타는 물론 무술계의 전설로 남게 된다.

홍콩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에 설치된 이소룡의 동상. 2019.10.01/ ⓒ 로이터=뉴스1 ⓒ News1 박재하 기자

◇최고의 순간에 떠난 전설

이소룡은 '용쟁호투'의 촬영이 끝나고 개봉을 불과 6일 앞두고 1973년 7월20일 3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최고의 순간에 요절했기에 그의 죽음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중국 범죄 조직 삼합회가 그를 암살했다는 등의 여러 허황된 음모론들도 나왔다. 하지만 부검 결과 사인은 복용 약품 부작용과 그로 인한 뇌부종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소룡이 사망 전 일부 촬영을 했던 유작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는 대역을 동원해 1978년 개봉한다.

이 작품에서 이소룡은 '사망탑'을 차례로 올라가며 층마다 무술의 고수를 격파한다. 이때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노란색 트레이닝복이다. 이 운동복은 아직도 곳곳에서 패러디와 오마주되고 있다.

1978년 개봉한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에서 이소룡이 입은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오마주한 나이키 농구화를 한 농구선수가 신고 있다. 2023.04.03/ ⓒ 로이터=뉴스1 ⓒ News1 박재하 기자

◇여전히 기억되는 신화적 인물

이소룡은 단 5편의 주연 장편영화를 남겼지만 그는 영화는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

이소룡 특유의 무술 액션은 성룡과 이연걸, 견자단으로 이어지는 홍콩 액션 배우들의 표본이 됐다. 21세기 할리우드에서도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들과 '존윅'(John Wick) 같은 영화에도 이소룡의 영향력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소룡은 동양인에게 드높던 할리우드의 문을 연 선구자로 꼽힌다. 한때 미국무술협회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배우' 1위에 이소룡이 뽑히기도 했으며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그의 영문 이름인 '브루스 리'라는 명판이 있다.

이소룡은 무술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기도 했으며 무술을 단순히 강해지는 도구가 아닌 철학적 사유도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MLS)의 시애틀 사운더스는 지난 2월 "이소룡이 강조한 조화, 자기표현, 포용성, 행동을 반영했다"며 이소룡의 50주기를 기리는 유니폼을 공개했다.

홍콩문화박물관은 이소룡의 50주기를 맞아 이달 '브루스 리: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라는 특별전을 연다. 관람객들은 이소룡이 창시한 절권도를 배워볼 수 있으며 그의 영화도 상영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그를 기리며 "이소룡은 생전 영화 4편만 완성했지만 그는 사살상 하나의 장르를 개척했다"며 "이소룡은 글로벌 문화의 DNA를 관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jaeha6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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