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만 뽑았는데 에이즈에 걸렸습니다”...죽음이 덮친 마을, 시대의 비극에 울었다 [나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7. 15.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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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기행, 나쁜 책-1] 옌롄커 소설 ‘딩씨 마을의 꿈’
책읽기의 자유는 기나긴 싸움의 결과였습니다. 지금은 책방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지만 과거엔 책장에 꽂아두기만 해도 죽임을 당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 그는 중국에서 최다수 금서를 가진 반체제 작가이면서, 동시에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중국 최고의 작가입니다.
책을 냈는데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가 작가를 고소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심지어 작가의 개인 비위 때문이 아닌, 출간한 책 속의 ‘내용’을 문제 삼아 작가를 고소했다면 정상적인 상황일까요.

중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입니다. 중국 소설 거장 옌롄커(65) 얘기입니다. 그는 중국 내 가장 논쟁적인 작가이자 현존 세계 최다수 금서의 작가입니다. 당장 확인되는 옌롄커 중국 내 금서만 8편입니다.

소설 ‘딩씨 마을의 꿈’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출판사는 옌롄커가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고 출판사에 정치·경제적 손실을 입혔다며 옌롄커를 고소합니다.

‘딩씨 마을의 꿈’은 옌롄커가 중국 허난성 집단 에이즈 감염 사태를 문학적으로 고발한 작품입니다. 중국 정부는 출간 직후 이 소설의 발행, 유통, 홍보 등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요.

주사 약솜 하나로 ‘9명’을 문질렀다
중국 소설가 옌롄커. [매경 DB]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은 피를 팔고 사는 매혈(賣血/買血)로 인한 중국 내 집단 에이즈 발병 사태를 정치적 우화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배경은 딩씨 집성촌, 인구 약 800명에 가구 수는 대략 200호인 촌읍입니다. 딩씨 마을에서 2년간 주민 약 40명이 에이즈로 사망했습니다. 매혈 운동이 국가 사업으로 진행된 뒤 10년쯤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0년 전은 피가 금(金)처럼 비싸게 팔리던 시대였습니다. 너도나도 채혈소로 달려갔습니다. 미친 듯이 피를 팔았습니다. 붉은 참깨 같은 주삿자국이 팔뚝에 선명했지만 주민들 욕심은 눈을 가렸습니다.

2019년 출간된 옌롄커 장편소설 ‘딩씨 마을의 꿈’. 이 기사는 위 책을 저본 삼았습니다. [자음과모음]
채혈소 우두머리 ‘딩후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채혈소의 피 한 병 단가는 80위안. 딩후이는 85위안을 약속했습니다. 대신 피 파는 사람을 속이고 ‘한 병 반’을 뽑아냈습니다. 급기야 딩후이는 약솜 하나로 아홉사람의 팔을 문질렀고 주사기도 재활용했습니다.

주민들 몸에서 고열이 나기 시작합니다. 에이즈가 집단 발병한 것입니다. 죽음이 딩씨 마을을 덮칩니다.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죽음은 매일 모든 집의 문 앞을 서성거렸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기처럼 어느 집 앞에서 방향을 틀기만 하면 그 집은 영락없이 열병에 감염되었고, 다시 석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침상 위에서 죽어나갔다.”(31쪽)

딩후이는 마을 주민들의 표적이 됩니다. 대대적으로 피를 매집한 딩후이에게 복수를 결심합니다. 딩후이는 타인의 피를 팔았을 뿐 자신의 피는 팔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이 몰려가 딩후이를 살해하려 하자 딩후이는 ‘현 열병위원회 부주임’으로 승격된 자신의 임명장을 꺼내 보여줍니다. 이제 주민들 그 누구도, 딩후이 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습니다.

에이즈 감염보다 더 두려운 ‘관 확보전’
에이즈 사망자 유족들은 독약 묻힌 과일을 딩씨 집안 근처에 놓아 딩후이네 가축부터 씨를 말립니다. 독약이 묻은 토마토를 먹고 딩후이 아들도 흰 거품을 물고 사망합니다.

파렴치한 딩후이와 달리, 딩씨 마을의 양심적인 선생이자 딩후이의 아버지인 ‘딩수이양’은 마을의 에이즈 환자를 학교로 모으기 시작합니다. “앞날을 모색하자”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집결한 주민들은 사기, 절도, 불륜을 서슴지 않습니다. 양식 주머니에 벽돌, 돌덩이, 기와를 넣어 무게를 속입니다. 또 모두가 잠든 사이 타인의 물건을 훔칩니다. 죽음을 앞두고 사촌의 아내와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작가 옌롄커는 인간의 민낯에 촛불을 들이댑니다.

‘딩씨 마을의 꿈’은 1990년대 중국 매혈 시장과 에이즈 사태를 모티브 삼았습니다. 지도는 인구 10만명당 HIV 감염자 비율(2015~2016년). [WhinyTheYounger]
딩후이가 ‘매혈 경제 체제의 초고위층 갑부’로 올라서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에 자세합니다.

딩후이는 에이즈 사망자에게 국가가 공짜로 나눠주던 관부터 빼돌립니다. 무료로 챙긴 수백 개, 수천 개의 관을 이웃 마을에 저렴한 가격에 매도해 종잣돈부터 모읍니다. 딩후이는 그 돈으로 관 가공공장 5개 운영권을 따냅니다. 이어 관 공급량을 조절해 관 가격을 폭등시킵니다.

관 품귀 현상이 일어나 값이 2배, 3배, 5배씩 뛰자 서민들은 관을 구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죽어서도 안식을 누릴 수가 없어졌습니다. 다급해진 당국이 에이즈 감염 사망자만 관을 구매할 수 있도록 규제하자 딩후이는 가짜 에이즈 감염 증명서를 팔아 또 이윤을 취합니다. 관 재료로 사용될 목재 가격까지 폭등합니다. 야산의 모든 나무가 관 제작을 이유로 벌채됩니다.

“마을이 온통 관 마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싼값에 관을 구입하게 된 사람들은 정부가 관을 지원해줬다는 생각에 자신이 열병에 걸린 것도 잊고, 집 안에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이 누워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미소를 띤 얼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볍고 즐거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래 자기 집에 열병이 걸린 사람이 없어 당연히 관을 살 수 없었지만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여 결국 관을 손에 넣게 되자, 겁 없이 눈을 똑바로 뜨지 않고 관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물쇠를 잠가놓았다. (중략) 관을 얻기만 하면 죽어도 아무 걱정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329~332쪽)

딩후이는 ‘관 시장’ 장악도 모자라 주민들이 가족을 묻을 무덤 위치까지 판매합니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젊은 총각, 젊은 규수의 영혼 결혼을 뜻하는 ‘음혼(陰婚)’ 사업에도 뛰어들어 떼돈을 법니다. 딩후이 금고의 자금은 고스란히 현의 고위 관료 뒷돈으로 들어가고, 딩후이는 더 큰 이권을 약속받습니다.

펜을 메스 삼은 작가 옌롄커는 재앙의 작동 방식을 노련하고도 치열하게 해부합니다.

중국의 에이즈 근절 노력은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 UN에이즈계획(UNAIDS) 산하 프로그램 조정 위원회(PCB) 대표단이 중국 정부의 에이즈 대응 방안을 점검하고자 중국을 방문한 모습. [UN에이즈계획 홈페이지]
서민 삶이 피폐할수록 매혈과 에이즈는 비례했다
이 과정에서 주사기 등 부수 기자재 재사용, 혈액과 식염수 혼합 등 상상 초월의 비위가 난무했습니다. 1993년 10월 우리나라 한 일간지를 보면 이런 기사도 발견됩니다.

당시 중국에 입국하려면 에이즈 비감염 증명서가 필수적이었습니다. 홍콩의 한 기업인은 베이징 공항에 도착 후 중국 관료로부터 에이즈 비감염 증명서를 1000홍콩달러(당시 원화로 약 10만원)에 사들여 입국했다가 적발됐습니다.

‘딩씨 마을의 꿈’은 문학적 상상력이 아닌 실제 사건을 모티브 삼았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국 허난성에서 100여개 넘는 마을에 채혈소가 들어섰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중국의 선량한 농민들이 매혈에 뛰어들었습니다.

본지 2012년 12월 1일자 국제면 기사. 그해 11월 29일 중국 베이징시 왕푸징 거리에서 중국 허난성 출신 에이즈 환자 100여명이 정부청사로 행진하며 “1990년대에 발생한 비극(집단 에이즈)에 대해 정부가 보상하라”고 주장했습니다. 1990년대 허난성 지도부엔 차기 총리로 거론된 리커창 부총리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매년 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입니다. [매경 DB]
그러나 중국 사정은 달랐습니다. 허난성 집단 에이즈 사건은 21세기 들어서도 지속되는 사회적 재앙입니다. 2012년 12월 1일(세계 에이즈의 날)엔 허난성에서 매혈과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 100여명이 베이징시로 찾아와 1990년대 집단 비극에 대한 정부의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당시 리커창은 부총리였고 차기 총리 후보로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허난성 재임 시절 에이즈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당시 리커창 부총리에게 꼬리표처럼 달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서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최후의 방편이 매혈이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로 검색해보니 1956년 3월 24일자 한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네요. “자기의 피를 돈과 바꾸려는 매혈 희망자들이 요즘 들어 부쩍 늘어 매일 같이 ‘혈액은행’ 문전에 쇄도하고 있는데 이 서글픈 군상은 그대로 참혹한 ‘민생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 매혈을 완전히 금지한 시기는 1982년이었습니다. 헌혈을 늘려 필요량을 충당하고 매혈은 완전히 금지 시켰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중국 소설가 옌롄커의 소설과 산문집. 옌롄커의 노벨문학상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최근 그의 작품은 한국에 다수 출간됐습니다. [각 출판사]
옌롄커가 작품으로 남긴 소설 속 기구한 사연은 가슴이 아픕니다.

(1) 자오씨우친이란 여성의 남편 왕바오산은 피를 팔아 그녀를 아내로 맞습니다. 결혼한 그녀는 피를 팔아 남편이 자신을 맞느라 빌렸던 나머지 돈을 대신 갚습니다. 남편 왕바오산은 멀쩡한데 아내 자오씨우친이 에이즈로 사망합니다.

(2) 우샹즈의 어린 딸아이는 그녀가 젖을 물리자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합니다. 우샹즈도 그녀의 딸도 피를 판 적이 없었습니다. 피를 판 사람은 우샹즈의 남편이었죠.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해 자신만 피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만 살고 아내와 딸아이를 떠나보냈습니다.

작가 옌롄커가 에이즈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선입관을 확산하려 ‘딩씨 마을의 꿈’을 쓴 건 아닙니다. 그는 에이즈 집단 감염 사태를 촉발한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를 겨냥합니다. 특히 에이즈 집단 감염으로 고통을 받은 중국 허난성은 옌롄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는 고향에서 발생한 재앙을 문장으로 남겨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동시에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할 허난성 서민을 애도합니다.

‘딩씨 마을의 꿈’의 서문과 작가 후기에 옌롄커는 씁니다.

“유일하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독자들이 내 소설을 읽을 때, 내가 쓴 ‘딩씨 마을의 꿈’을 읽을 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먼저 독자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 소설이 가져다줄 고통에 대해 모든 독자들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고 싶다.” (623~624쪽)

영화 ‘허삼관 매혈기’의 한 장면.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위기의 가장을 그립니다. 옌롄커의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은 매혈을 소재로 다루지만 집단의 비극을 주제 삼습니다. [NEW]
위화의 매혈, 옌롄커의 매혈
1958년생 중국 허난성 출생인 옌롄커의 첫 직업은 사실 군인이었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던 옌롄커는 먹고 살기 위해 군인으로 복무했고 중국 해방군예술대학에 진학해 문예를 공부하면서 ‘군인 신분’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독특한 이력이지요.

체제를 옹호하는 군인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작가인 옌롄커의 소설 작법은 ‘이중적 글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四書)’, ‘풍아송’, ‘작렬지’, ‘레닌의 키스’, ‘연월일’ 등 옌롄커의 다른 소설도 인간의 욕망, 사회의 금지규범을 파헤칩니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옌롄커의 또 다른 대표작 ‘사서’는 2016년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당시 최종후보 경쟁작이었습니다.

옌롄커 소설 ‘사서(영문명 The Four Books, 왼쪽 두 번째)’는 2016년 맨부커상을 두고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오른쪽 두 번째)’와 경쟁했습니다. [부커상 홈페이지 캡처]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옌롄커 소설 중 최고의 스캔들이었습니다. 마오쩌둥 공산당의 선전구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为人民服务)’를 남녀 간 외설스러운 성적 구호(‘군인 직속상관의 아내를 위해 성적으로 봉사하라’)로 바꿔버린 옌롄커의 이 소설은 정식 책 출간도 전에 판매금지 조치를 당합니다. 옌롄커는 그러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보다 ‘딩씨 마을의 꿈’과 ‘사서’를 읽어달라고 당부한 바 있습니다.

위화 작가의 1995년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중국 매혈 시장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딩씨 마을의 꿈’보다 ‘허삼관 매혈기’가 더 익숙하지요.

위화의 작품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큰 돈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팔아 가족을 먹여 살리는 소시민의 애환을 그렸습니다. 두 작품의 문학적 성취엔 이견이 없지만 매혈을 소재로 일부 자본가의 이기심과 관료의 내통을 고발한 옌롄커의 소설, 개인의 고통을 화두 삼은 위화의 소설은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릅니다.

매혈을 소재로 한 소설이지만 ‘딩씨 마을의 꿈’은 금서고 ‘허삼관 매혈기’는 금서가 아닙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딩씨 마을의 꿈’을 번역해 한국에 소개한 김태성 한성문화연구소 대표는 지난 11일 통화에서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허구이고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은 실제 사건이었기 때문에 중국 내 출판을 총괄하는 광전총국 대응이 달랐던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김 대표는 “1990년대 허난성에선 매혈 도중 바늘 아끼려고 사용했던 주사기를 계속 썼다. 당시 내가 베이징에 있었는데 에이즈 확산 때문에 허난성을 정부가 무장 봉쇄할 정도로 심각했다”며 “봉쇄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성을 탈출해 대도시로 가서 무차별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주사기로 찔러 테러한다는 가짜뉴스까지 나돌았다. 옌렌커는 중국의 역사와 고통을 소재 삼았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딩씨 마을의 꿈’ 유통을 당장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합니다. 특히 엔렌커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통해 이미 한번 금서의 작가로 낙인이 찍혔던 만큼 더 엄격한 검열이 대상이 됐겠지요.

“금서 많은 작가보다 ‘좋은’ 작가가 될 것”
2020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 ‘침묵과 한숨’의 ‘제5장 금서와 쟁론에 대한 몇 가지 견해’에서, 옌롄커는 자신을 금서 작가로 보는 세상의 시선을 사유합니다.

“금서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다. 금지한다고 해서 다 잊히는 것은 아니며 인정받는다고 해서 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식 글쓰기 환경에서 평생 글을 썼는데도 쟁론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작가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110~114쪽 발췌)

옌롄커는 자신의 소설을 “서랍 문학”이라고 표현합니다. 중국 내에서 발표되지 못하고 서랍 속에 갇힐 운명의 글이란 의미가 함축된 단어입니다.

하지만 서랍에 갇힐 운명이었던 옌롄커 작품은 언제나 서랍 밖 세계를 향했습니다. 소설 속 딩후이의 최후를 비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작가 옌롄커는 시대의 울음을 위로하지요.

2019년 방한 당시 옌롄커. [매경 DB]
‘딩씨 마을의 꿈’에서 딩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약간(?)의 ‘스포일러’입니다.

아버지 딩수이양은 아들 딩후이를 몽둥이로 때려 죽입니다. 방금 아들을 죽인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비명의 속죄 의식을 지릅니다.

“여보게, 다들 듣고 있지? 내가 좋은 소식을 한 가지 알려주겠네. 내가 우리 집 큰아들 딩후이를 때려 죽였다네. 뒤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단 말일세···.”(607쪽)

하지만 그 누구도 울부짖는 딩수이양을 내다보지 않습니다. 딩씨 일가를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딩씨 일가를 용서할 사람들이 전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딩씨 마을 사람들은 이미 에이즈로 전부 죽고 없습니다. 딩수이양의 참회도 딩후이의 죽음도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침묵과 한숨’에 실린 옌롄커의 과거 글 한 줄을 인용하며 글을 맺습니다.

“요컨대 내 일생의 노력은 좋은 작품을 써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 금서가 가장 많고 쟁론의 대상이 가장 많이 되는 작가가 아니라 좋은 작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113~114쪽)

타인을 죽음으로 내몬 인간의 탐욕은 언제쯤, 누구에게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중국판 ‘페스트’인 이 소설은 덮는 순간 더 먹먹해집니다.

더 읽어볼 가치가 큰 옌롄커 책과 관련 글 ◎ 옌롄커, 문현선 옮김, 《사서》, 자음과모음, 2012. ◎ 옌롄커, 김태성 옮김, 《레닌의 키스》, 문학동네, 2020. ◎ 옌롄커, 김태성 옮김, 《침묵과 한숨-내가 경험한 중국, 문학, 그리고 글쓰기》, 글항아리, 2020. ◎ 노벨문학상 후보 中소설 거장 옌롄커 인터뷰 “어둠 없이는 아름다움도 무의미” (https://www.mk.co.kr/news/culture/9509043) ◎ 이혁, <‘허구’와 ‘비허구’의 경계>, 《문화·경영·기술》 Vol.2 No.2, 아시아문화컨텐츠연구소, 2022.

※ ‘금서기행, 나쁜 책’은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다음 주에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와 전두환 군부쿠데타 세력 양측에서 동시에 비판을 받은 이문열의 1980년대 금서 ‘필론과 돼지(원제 필론의 돼지)’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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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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