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통로 암문은 왜 눈에 띄게 만들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23. 7. 15.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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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폐쇄 개념인데 문은 소통이나 개방 개념이다. 사진은 북암문. 이강웅 고건축가 제공

 

성에서 문은 쓰임새와 관계없이 매우 중요하다. 성 자체가 폐쇄성이 강한 시설인데 문은 성 안팎의 소통 시설이다. 이런 문을 적으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다. 화성에는 대문 4곳, 암문 5곳, 수문 2곳이 있다. 5곳의 암문은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남암문이다. 동서남북 외에 서남암문을 둔 것은 용도를 통해 서남각루로 소통하는 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의궤에 암문을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내어 두어 적이 그 길을 알지 못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해 적군이 그 길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은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일까? 과연 어느 정도 이 취지를 따랐을까? 이렇게 자문하는 이유는 화성 암문은 은폐와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남암문은 아예 시장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서남각루로 통하는 서남암문을 제외하고 설치 장소와 외부 모양으로 나눠 은폐 상태를 평가해보자. 첫째, 암문 위치를 보면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모두 양쪽이 높은 지형이고 그사이 움푹 내려간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돼 암문의 기본에 충실한 편이다. 남암문은 성안 주택가와 성 밖 장터 사이 한가운데 설치돼 있어 은폐 개념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암문의 요체는 은폐이다. 은폐 설계의 모범은 서암문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제공

둘째, 암문 자재를 보면 모든 암문에서 벽돌을 사용했다. 암문 위 여장까지도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 색은 검은색으로 ‘검은색’ 하면 언뜻 은폐가 떠오른다. 하지만 좌우의 성은 돌이어서 희게 보이므로 대비가 돼 오히려 눈에 잘 띈다. 은폐와는 거리가 멀다. 셋째, 암문 모양을 살펴보면 동암문과 북암문은 각각 대원여장과 비예를 설치했다. 모양이 둥글고 높고 크다. 서남암문 위에는 아예 포사 건물을 얹었다. 남암문, 서암문은 평여장이다. 대원여장, 원여장, 비예 모두 인접한 성의 여장에 비해 크고 모양도 돋보이는 형상이다. 전체 암문 모양에서도 은폐와는 정반대다.

종합하면 암문 위치로는 남암문과 서남암문은 전혀 은폐와 동떨어진 위치다.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은 은폐에 충실했다. 사용 자재로 보면 모든 암문에 벽돌을 사용하므로 주변 석성의 흰색과 대비돼 은폐와 동떨어진 자재를 사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암문 모양은 동암문과 북암문은 높고, 크고, 둥근 모양의 대원여장과 비예를 갖춰 은폐와 관계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 서남암문은 위에 집을 얹어 이 역시 은폐와 거리가 멀다. 전반적으로 화성 암문은 은폐에 대한 배려는 없고 오히려 눈에 잘 띄는 암문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마디로 비밀통로 암문이 공개통로 암문으로 바뀐 듯하다.

화성 암문은 왜 눈에 띄게 했을까? 왜 공개된 암문으로 만들었을까? 화성 미스터리의 하나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 기록에 그 답이 있다. 의궤에 “성안으로 거둬들이는 사람, 가축, 수레, 양식 따위는 다 이 문을 통하게 된다”고 목적과 기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암문’이란 단어가 주는 ‘비밀스러움’이나 ‘은밀함’과 다르다. 화성 암문은 민간인의 빈번한 통행을 목적으로 설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검은색 벽돌, 높고 큰 원형여장은 은폐의 개념과는 정반대다. 이강웅 고건축가 제공

또 ‘암문이란 것은 성의 사잇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문은 지역 간 통로, 대규모 통로, 공식적 통로이고 암문은 지역 내 통로, 소규모 통로, 백성의 통로로 쓰였다는 의미다. 이렇듯 성 밖 백성의 실질적 통로로 대문보다 암문이 사용 인원이나 빈도가 더 높았을 것이다. 성 밖 하층 백성의 마을에서 성안으로 오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암문을 둔 것도 백성을 위한 공개된 통로임을 증명한다. 화성 암문은 세계의 모든 암문 중 유일한 공개된 암문이다.

그렇다면 공개된 암문은 적으로부터 안전할까?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이미 이에 대한 대책이 세워져 있었다. 암문 계획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부분이 전시대책으로 ‘암문 봉쇄’다. 의궤에 “흙을 쌓아 이 문을 막으면 성과 똑같게 되는데 형편에 따라 통해 놓기도 하고 막기도 해 임기응변하기에 편하게 만들었다”란 기록이 있다. 위급 시 흙으로 메워 암문을 봉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는 의미다.

짧은 시간에 흙으로 메우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쏟아붓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의 위치가 양쪽이 높고 그 아래 푹 꺼진 곳을 택한 것이다. 남암문과 서남암문은 좌우 높은 내탁부에 흙을 쌓아 두었다가 아래로 쏟아부었다. 봉쇄 시간을 계산해 보니 서암문 경우 위급 시 우선 문 높이까지 메운다면 18㎥의 흙이 소요되고 3명의 병사가 30분 내 봉쇄가 가능하다.

두드러져 보이는 동암문 모습. 이강웅 고건축가 제공

이처럼 화성의 암문은 백성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오히려 눈에 잘 띄도록 계획했다. 크고 둥근 원여장이나 검은색 벽돌 자재를 사용한 것이 그 이유다. 성역 당시로는 고급 자재인 벽돌을 사용해 멋지고 큰 원여장으로 치장했다. 화성을 상업의 도시, 자족의 도시로 만들 계획을 한 정조는 암문을 이용하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최하층 백성에게 자존심을 세워주는 선물을 한 것이다.

전쟁 기간과 평시 기간을 고려한 현실적 배려가 배어 있는 암문이다. 이 세상 어느 암문과 다른 화성 암문이다. 화성의 암문을 보면서 정조의 애민사상은 사상이 아니라 실천임을 알았다. 오늘도 머리 숙여 암문을 빠져나가며 정조의 가슴을 엿보았다. 화성 암문은 역발상, 그 자체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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