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대법원 앞 정의의 여신이 눈을 뜨고 있는 이유

오윤희 사회부장 2023. 7. 1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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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엔 저울을,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있다. 옳고 그름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로 잘잘못을 정확하게 가리고, 죄를 지은 자는 엄정하게 처벌하기 위해서다. 법을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법치주의가 확립되면서 디케는 법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세계 각국 법원 앞에서 디케 여신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때로 디케 여신은 안대로 눈을 가린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편견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겠다는 의미다.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할 법이 사사로운 감정이나 주관에 휘둘려선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디케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바람에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못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법이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쫓아오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던 주요 사건과 관련법을 통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볼까 한다.

지난 6월 경찰은 자신이 낳은 아기를 목 졸라 살해한 뒤 냉장고에 시신을 유기한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 피의자 고 씨의 혐의를 ‘영아살해’에서 ‘살인’으로 바꿨다. 현행법상 영아살해는 산모가 아이를 양육할 경제적 형편이 안 되거나, 강간 등 원치 않은 출산을 했을 경우 직계 존속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분만 중 혹은 분만 직후 영아를 살해한 범죄를 가리킨다. 일반 살인죄는 최소 5년 이상 징역형을 받는 반면, 영아살해죄 형량은 하한선 없이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규정돼 있고, 실제로는 대부분 3년 이하 징역 또는 집행유예를 받는 데 그친다. 한 마디로 ‘영아살해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아기와 어른의 생명에 다른 값을 매기고 있음을 의미하고, 이는 영아살해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

외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든 ‘반의사불벌죄’ 역시 개선이 시급한 법 규정 가운데 하나다. 1953년 도입된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수사기관은 수사를 다 하고서도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경범죄에서 당사자 간 합의를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 반의사불벌죄는 최근 스토킹 범죄자나 성범죄 가해자들이 피해자로부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억지로 받아내고 법망을 빠져나가는 목적으로 자주 악용되곤 한다. 작년 9월 서울 지하철 신당역에서 입사 동기 여성을 칼로 찔러 살해한 범인은 피해자를 불법 촬영하고 스토킹한 죄로 구형받을 위기에 처하자, 피해자에게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해 달라’며 매달렸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보복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다. 반의사불벌죄가 없었더라면 신당역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법도 인간이 만드는 것인 만큼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회와 시대 변화에 따라 개선해 나갈 수는 있다. 최근 영아살해죄와 반의사불벌죄에 대한 폐지 움직임이 속도를 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은 많다. 피해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는 제조물 책임법도 그중 하나다. 작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손자를 태우고 운전하던 60대 여성이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를 당했다. 운전자였던 할머니는 크게 다쳤고 12살 손자 도현 군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할머니를 포함한 도현 군 유가족은 올해 1월 KG모빌리티(옛 쌍용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유족들과 KG모빌리티 양측은 이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다. 사건 정황상 차량의 결함이 있었을 가능성은 크다고 보이지만, 현 상황에서 제조사에 책임을 물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 국내 제조물 책임법은 피해자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소비자가 차량 결함 여부를 증명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여러 차례 법 개정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아직까지 개정되지 않은 상태다.

법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인 만큼 항상 개선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개선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여러 법 규정을 무작정 고수하기만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을 개정하라는 요구에까지 귀를 막고 있다면 그야말로 ‘눈멀고 귀 먼 법’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이례적으로 안대를 쓰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 우리가 왜 앞을 보지 못하는 정의의 여신 대신 세상을 똑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정의의 여신상을 세웠는지 그 이유를 늘 새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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